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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최원현 |
날짜 : 03-11-25 21:58
조회 : 3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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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향하여(3)
마지막 편지
- 김 노인의 마지막 사랑 엽서 -
최원현
++++ 생명이 다 한다는 것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겨울을 바로 앞에 두고 스산한 바람이 일때 한 잎, 두 잎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 마음,
아니 정성들여 키우는 난이 시름 시름 앓다가 아주 말라버리는
모습을 보면서는 또 어떤 생각을 하게 되나요?
자연의 질서 앞에서 가슴으로 안는 또 하나의 순리,
우리는 그걸 무어라고 표현 하나요?
그리 멀지 않게 다가올 나의 모습,
그러나 너무 준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
*
눈을 감고 있어도 이렇게 잘 볼 수 있다는 것은 감히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것도 아주 영원히 잊어버린 줄 알았던 것들까지 이토록 생생하게 떠오르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들까지 이리도 선명히 떠오르는 것은 이 땅의 모든 인연에서 떠나가는 내게 베풀어지는 마지막 은총일까.
김노인은 감았던 눈을 조심스레 떠봤다. 그러나 눈이 부셔 이내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이었지만 창문을 통하여 모과나무에 유난히 많이 열려있는 모과를 보았고, 노랗게 익어간 모과 색과 늦은 오후의 햇볕색이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 뿐 아니다. 팔랑팔랑 떨어져 내리는 모과나무 이파리 하나도 그는 놓치지 않았다. 아니 한껏 빛부신 모습으로 열려있는 모과 열매와 떨어져 내리는 모과나무 이파리는 김노인에겐 아주 졀묘한 대비로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었던 것이다.
달려 있다는 것 곧 살아있다는 것과 떨어진다는 것 곧 생명을 잃는다는 것은 이처럼 가까이에서 함께 일어나고 있는 일이었다.
김노인은 손을 뻗쳐 머리맡의 성경책 속에 넣어 두었던 봉투를 꺼내 책 위로 올려 놓았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아내까지 손녀가 가는 것을 배웅하러 나간 이 시간, 김노인은 눈을 감은 채 지금도 지는 햇빛을 받으며 더욱 노랗게 익어가고 있을 창 밖의 모과를 생각했다.
모과는 나무에서 떨어져야 향기로움으로 더 사랑을 받게 되는데 그렇다면 모과는 또 한번의 생명을 시작한다고 봐야 할까?
김노인은 가족들에게 썼던 마지막 편지를 매만져 보며 자신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주고있는 가족들에 대한 깊은 연민으로 뜨거운 눈물이 양 볼로 흘러내렸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당신과 함께 한 50년의 삶동안 내가 소리내어 사랑한다는 말을 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요 마지막일 것 같소. 마음속에서야 늘 고맙고 사랑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우리 세대가 다 그렇듯이 요즘 아이들처럼 어디 그런 말 한 마디라도 쉽게 하게 되던가요.
무엇보다도 이날까지 그 험란한 세월을 다 거쳐 오면서도 삼 남매를 곱게 키워 내어 모두 다 제 몫들을 하게 해놓았고, 내가 이토록 편안한 마음으로 떠날 수 있도록 해 준 당신은 참으로 내겐 소중한 사람이오.
당신과 함께 한 반 백년의 세월은 참으로 바쁘게 살아왔던 날들인 것 같소. 해방과 6.25동란과 민주화로 이어지는 변화야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그런 격변의 때에 당신과 내가 걸어야 했던 길은 정말 힘들었지 않소? 다행히 당신을 만나 아이들을 낳고, 그 아이들을 위해 사랑과 정성을 쏟아 부으면서 힘든 줄도 몰랐던 것도 당신의 지극한 모성애와 책임감이 나보다 앞섰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게요.
그러나 자식들이 있다고 하지만 이제 이렇게 당신만 덩그마니 남겨놓고 먼저 떠나야 하는 이 길이 내겐 가장 미안하고 가장 힘든 나들이인 것 같소. 이 2년여 동안의 투병기간 동안 받았던 고통의 합보다도 훨씬 더 큰 아픔이요 슬픔이요 고통일 것 같소. 하지만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그래도 내 마음은 많이 가벼워진 다오.
당신은 내가 없이도 삶을 잘 꾸려갈 수 있으리란 신뢰감이 있기 때문이요. 하기야 뒤돌아보면 당신이 내 삶의 받침대가 되고 기둥이 되어 주었지 나는 당신에게 그다지 도움이 되어준 것 같지 않으니 그것도 내 기우가 아닐까싶기만 하오. 거기다 당신을 위해 남겨두는 것도 아무것도 없이 그 조금 남은 것까지 내 병 수발로 다 소진케 해 버렸으니 나는 참 할 수 없는 사람인 것 같고, 그렇기에 이렇게 당신이 이룩해 놓은 아성에서 살짝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이 한없이 다행스럽게 생각도 든다오.
마지막 부탁은 이제부터라도 제발 남은 날 동안 당신 자신을 위한 삶을 살았으면 싶소. 언젠가 바닷가에서 당신이 주워서 내게 주었던 소라 껍질처럼 당신의 몫이라곤 아무 것도 없이 되어버린 당신이지만 이제부터라도 당신을 위한 것으로 채웠으면 하오.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평생동안 줄줄만 알던 당신이지만 부디 이제부터는 당신 자신을 위해 주고, 당신의 것을 채웠으면 싶소.
창문을 열면 눈앞으로 바라보이는 모과나무가 있지요? 사람도 저 나무와 다를 게 없을 것 같소. 올해는 모과나무보다 내가 먼저 떠날 뿐이라오. 이 날까지 내게 보여준 사랑과 희생과 믿음을 난 이만큼 받고만 가오. 나는 참으로 몰염치한 사람인 것 같소. 그러나 한없이 행복하다오. 당신만 남겨두고 먼저 떠나는 것이 미안할 뿐이오.
김노인은 살며시 눈을 떠봤다. 언제 들어왔는지 아내가 거기 서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곁에 있어도 없는 듯, 없어도 있는 듯 함께 해 온 반백년의 세월 냄새가 아내에게서 짙게 풍겨났다. 슬픔과 아픔보다도 사랑과 책임감으로 살아갈 남은 날들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그리고 며늘아기야 사위야
하나님께서 분에 넘치도록 주신 은총이 바로 너희들이란다. 무엇 하나 넉넉하게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만 이만큼 성장하여 제각기 가정을 이루고 제 몫들을 충분히 하고 있는 너희들을 볼 때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이다.
너희보다 한참을 먼저 와서 그만큼 많이도 살았으니 너희보다 먼저 가는 거야 당연한 것 아니겠느냐. 더욱이 장한 너희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 진다.
이제 애비는 너희들 곁을 떠나 우리가 모두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간단다. 그 동안 잊고 살던 고향을 생각하니 왠지 두려움이 앞선다만 먼저 간 많은 좋은 분들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어 가슴이 두근대기도 하단다.
나는 단지 너희보다 먼저 왔던 만큼 먼저 가는 것이란다. 무엇보다도 감사한 것은 너희들 앞에서 그래도 내가 큰 고통 없이 떠날 수 있을 것 같음이다. 나야 당사자라 치고, 나의 그런 모습을 그냥 보고만 있어야 할 너희의 고통을 내가 어떻게 감수할 수 있겠니? 사람이 평안한 임종을 맞을 수 있는 것은 복중에서 복이요, 행복이요 축복이란다. 꽃이 피었다 소리 없이 향기만 뿌리고 스러지듯이 사람 또한 그렇게 조용히 가는 게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일이니?
사람은 수많은 가능성 속에 살아가기 마련이다. 생명이란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명 속에도 확실한 것은 오직 한 가지 뿐이란다. 바로 죽음인 것이다. 생명과 죽음의 신비, 이 두 개의 신비로움 사이에서 인간은 한 평생을 사는 것이란다.
사랑하는 아이들아 지금 나는 이 땅의 삶을 정리하고 있다. 슬프다거나 두렵다거나 한 것이 아니라 막상 정리라는 단어를 쓰고 보니 무엇부터 아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를 모르겠구나.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고 하셨고, 간디는 '내 나이를 완결했다'는 말로 최후를 마쳤다고 하지만 과연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의 기간을 잘 끝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니?
김노인의 눈앞에 자녀들의 어릴 적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나타났다 사라져 갔다. 길다면 긴 생이지만 막상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자신을 생각해 보니 참으로 착잡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젊었을 때는 생명과 시간의 영원성 같은 것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도 않았었는데 육체의 종말이 가까워지니 오히려 희망에 더 관심이 많아지는 것 같다. 그래도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영원을 바라보며 짧은 자신의 생애에 대한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인생의 종지부를 찍는 것일 게다.
만일에 이 땅을 떠나는 것이 모든 것의 끝이고, 다시 만날 약속의 날이 없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그토록 열심히 뛰고 싸우고 이룩했던 것들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만큼 허겁지겁 달려가야 할 이유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이 땅에 보내어져 해야 할 몫을 다하고 다시 부르심을 받아 귀향한다는 믿음이 없다면 인간의 죽음은 '슬픔'이란 단어만으로는 결코 대신 할 수 없으리라.
많이 차가와 진 김노인의 손을 아직 따스한 아내의 손이 꼬옥 쥐어주었다. 그 아내의 손에 물기가 젖어 있다. 그토록 인생 길을 걸어오면서도 한번도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던 그녀였건만 아내는 분명 이 손으로 눈물을 훔쳤던 것이다. 차가와 져 가는 자신의 육신에 아내의 따스한 체온이 시나브로 스며드는 것 만 같다.
'이는 내 뼈중의 뼈요, 내 살중의 살이라'(창2:23)고 고백하던 아담의 탄성처럼 새삼 아내에 대한 고마움이 걷잡을 수 없는 감격과 감동으로 전신에 몰려들었다. 함께 산다는 것은 이처럼 아름다운 일이었구나. 김노인은 조심스레 손을 빼서 아내의 손을 감싸 쥐었다. 힘을 잃어가는 자신의 손, 차가와져 가는 자신의 손이 아내에게 더욱 큰 슬픔을 안겨주는 것 같아 안타깝기만 했다.
김노인은 잡았던 손 대신 성경책 위에 올려놓았던 편지를 아내의 손에 쥐어주었다.
50년만에 사랑을 고백하는 떨리는 마음으로.
 감동: 전 국문과 학생이고 이번에 졸업합니다. 40년 후에 저도 저런 아름다운 모과향처럼 조용히 떨어졌으면 좋겠네여. -[12/21-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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