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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최원현 |
날짜 : 03-11-25 21:17
조회 : 37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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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새의 노래
-김 노인의 겨울 날 오후-
최 원 현
nulsaem@HanMir.com
***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서글픔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의 영역이 아닌가. 세월을 어찌 할 수 없듯 인간이 나이가 드는 이 현상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을 것 같다. 중년의 삶을 지나 노년에 이르면 아주 사소한 것에도 마음을 상하게 되고, 지극히 소심해 지는 것도 나이 든 현상이라 하겠지만 계절로는 겨울쯤 될 노년기의 삶이 일몰의 순간처럼 가장 엄숙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신과 가가워진 때문일 것 같다 ***
그에게 가정은 모든 것의 전부였다.
그런데 며느리만 서운한 것이 아니었다.
서운함으로 말하자면 아들 쪽이 더했다.
이제는 아무 구실도 못하는 인간 폐물로 여겨지고 있는 자신에 대한 서글픔보다도 청춘을 다 바쳐 일해서 공부시키고 장가 보내고 해 놓으니까 저희는 그저 거저 그렇게 된 것인 양 생각하는 것 같은 소치가 괘씸타 못해 분노가 치밀었다.
그러니까 어제 밤이었다.
며늘아기가 쭈빗쭈빗 하더니 전투를 치르러 나가는 병사 같은 자세로 내 앞에 앉는 것이었다.
"에미, 나한테 무슨 할 말 있냐?"
내가 입을 열어 주었더니
" 아버님, 이런 말씀 드리긴 죄송한데요, 이제 애들이 많이 크고 공부할 방도 너무 좁은 것 같고 해서 아버님 방하고 바꾸면 어떨까 해서요"
하기야 금년에 대학에 들어간 손자 녀석의 방이 내 방보다는 좀 작지, 그렇다고 못 지낼 만큼 작은 것도 아니고, 또 내 방보다 많이 작지도 않은데 아무래도 창문이 답답하게 나있기도 하고 하니 어미 마음으로 바꿔 주고도 싶으리라.
그런데 며느리의 다음 말이 내 비위를 더 건드리고 말았다.
" 아버님은 어머님도 돌아가시고 이제 혼자시니 조금 작은 방으로 옮기는 것이 오히려 더 낫지 않으시겠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은 아녔겠지만 내게는 이젠 해주는 밥이나 얻어먹고 사는 홀아비 형편이니 뭐 넓은 방까지 필요할 것이냐는 투로 받아들여졌다.
내가 특히 아들녀석에 화가 나는 것도 이런 말은 제 놈이 하면 했지, 왜 저는 쏙 빠지고 제 마누라를 대신 앞세우느냐 하는 것이다.
필시 저희 둘이선 의논이 되었을 텐데 아무래도 저는 차마 애비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으니 아예 어미가 나서서 총대를 매기로 했을 것이다.
사실 아내와 사별한 지 어느덧 3년여, 마누라가 있을 때는 생각할 수도 없던 불편함 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
다.
우선 빨래거리가 그랬고, 먹는 것도 늘 짐이 되는 기분이었다.
마누라가 있을 때야 아무 때나 들어와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마누라가 죽고 나자 식구들의 식사시간에 정확히 맞춰야 하고 그나마 입맛에 맞다 그르다 한 마디 해 볼 수도 없는 데다 밥상머리에서 버릇없이 구는 손자 손녀 녀석들에게 한마디하는 것도 자칫 음식 타박으로 오해 될까봐 몇 번이고 입을 다물고 만 것이다.
가정의 무게 중심이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 부부 중심에서 자식들로 옮겨져 버린 것이다.
사실 내가 아웃사이더가 되어버린 것은 일종의 정년퇴임과 마누라 죽음에서 오는 합병증 같은 것이었다.
40년의 세월을 교단에서 가르치는 일만 해 온 자신이요, 정년을 맞아 일선에서 물러난 뒤로는 아내와 더불어 여행도 갈 수 있었고, 아무 데든 가고싶으면 걸릴 것 없이 훌훌 떠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아내가 죽고 나자 선뜻 혼자서 어디 다녀온다는 것도 멋 적어지고 청승스럽다는 생각도 드는 데다 또 쉽사리 자식에게 이런 저런 이유를 대고 여행이니 뭐니 하는 그런 말을 끄집어내기도 어려워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내가 거처하는 방까지 제 자식놈과 바꾸라고 하니 서운함을 넘어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더욱이 이 방은 아내가 살아있을 때는 나와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내가 쓴 글을 읽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내 발표된 글을 아내가 소리내어 읽어주면 나는 드러누워 그것을 듣곤 하던 방이요, 어쩌다 부부싸움이라도 하면 편안하고 안전한 내 피난처가 되어주기도 했던 곳이다.
살림살이라야 책상과 책장, 그리고 T.V와 이불장 하나가 고작이지만 요즘은 책상도 큰상 하날 놓는 것으로 바꿔 글을 쓸 때도 지금은 그걸 이용하고 있다. 그러니 방을 옮긴다고 해도 뭐 특별히 크게 수고로울 일도 없을 것이지만 내겐 수십 년의 추억이 담겨있는 내 마지막 자존심이기도 한 곳이었던 것이다.
문득 며늘아기가 전에 드라마에 나오던 철의 여인 인수대비라도 되는 것같이 생각되어 의당 한 번 입에서 나온 말은 실천되고야 말 것이라는 체념이 먼저 내 마음을 압도해 버렸다.
사실 요즘 내 나이면 아직 한창 때라고들 한다.
건너편 아파트에 사는 송 교장도 정년퇴임 후에 새 장가를 들어 깨알 쏟아지는 삶을 살고 있고, 슈퍼 옆 박 교수 역시 정년 후에 재혼을 한 케이스가 아니던가.
그렇다고 내가 아내 죽은 3년만에 그간의 사랑이 일순간에 식어져 버렸고 새 사람과 새 살림을 나고 싶다는 욕심을 부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식에게서까지 이젠 쓸데없는 늙은이로 여겨지는 자신이 안타깝고 가엾어서이고 자존심이란 자존심도 모두 다 오뉴월 땀방울 떨어지는 것처럼 스럼스럼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혼자가 된 3년 동안 사는 것이 사는 것 같지 않은 뼈 시린 고독의 날을 벌써 숱하게 겪고 있다.
돌아누워도 등이 맞닿는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이고 행복이었는지 요즘 들어 눈물 나도록 실감하고 있다. 늙으면 새삼 묵은 정이 그리워진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정도 10대 지학(志學)에는 번갯불의 정이요,
30대 이립(而立)에는 장작불 정이며,
40대 불혹(不惑)은 화롯불 정이며,
50대 지명(知命)은 담뱃불 정이고,
60대 이순(耳順)은 잿불 정이고,
종심(從心)의 70대는 반딧불 정이라 지만
한국인의 평균 연령이 80에 가까워지고 있는 마당에 몸도 마음도 결코 못 쓸 만큼 늙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자신이 아닌가.
괴테는 72세의 나이로 17살 난 소녀와 연애를 했고,
빅토르 위고는 70살에도 젊은 하녀 브람쉬와 뜨거운 사랑을 나눴으며,
안소니 퀸은 74살에 여비서와의 사이에 자식까지 낳지 않았던가.
뿐 아니라 성경에도 아브라함은 100살에 아들 이삭을 낳았다.
근자에 우리 나라 모 화가도 막내 딸 같은 연하의 여인과 잘도 살고 있지 않는가.
나이란 것도 어찌 생각하면 외형적 규정 같은 것일 뿐 실제는 사람에 따라 활동력은 전혀 다를 수도 있는 것이고, 나 또한 4.50대 보다 못하란 법 없는 것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서운함이 풀려지기 보다 더해지는 것 같다.
그러다 가만히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니 그래도 대과 없는 삶을 살아왔다 생각은 드는데 이제 남은 날들을 어떻게 후회 없이 살아가야 할 지, 그럴려면 어떤 준비가 필요할 지가 새삼걱정이 된다.
앙드레 지드는 '새로운 세계는 인간이 만들어 낸 세계이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남자들은 세 번의 상실감을 겪는다고 한다.
첫 번째는 예비군 해제 때이고,
두 번 째는 민방위 해제,
세 번째는 정년퇴직이라는 것이다.
곧 사회에서 이젠 내가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공식 인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그것은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는 고백과 같이 특별한 사고 하나 없이 그렇게 맡은 일들을 잘 마칠 수 있었음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오래 전에 들었던 친구 K의 이야기는 지금도 내게 큰 힘이 되고 있다.
그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화물차 운전으로 학비를 벌 때였다고 한다.
어느 날 물건을 가득 싣고 몇 시간을 고속도로로 달려갔는데 휴게소에서 잠시 쉬려다 보니 차의 뒷문이 열려있고 싣고 가던 물건은 하나 남김없이 다 없어져 버렸더라고 한다.
이제는 감방 생활하는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하고 별 수 없이 사장에게 가 무조건 잘못 했다고 했더니 사장은 그러지 말라면서 그럴 때를 대비해서 보험을 들어놨기 때문에 아무 걱정을 말라며 오히려 위로까지 해 주더라는 거였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나를 위해 들어진 보험처럼 내가 탈없이 정년까지 마치고 퇴임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해 두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아니겠는가 생각되어져서이다.
육체가 노화함에 따라 신체적 기능이 약화되고 건강도 상실되며, 이로 인해 생활능력, 경제적 능력도 잃게 된다고 하지만 그건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에 순응해 가는 법을 몸으로 익히는 과정이 아닐까.
늙으면 많은 것을 잃는다고 하지만 그것을 역으로 생각해 보면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랴. 책임과 의무와 신분과 욕심에서까지도 자유 할 수 있는 시기가 노년의 때일 것이기 때문이다.
곧 노년이 되는 것은 완전한 성숙이요, 삶의 지혜를 터득한 선생이 되는 것이요, 인생의 욕망과 성취를 초월한 경지에 이른 어른이 되는 것으로 상실과 의존의 세대를 제2의 삶을 시작하는 시기로 삼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사실 김 노인 자신도 이런 생각을 늘 해 온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의지할 보루라고 믿었던 피붙이 자식까지도 남이라는 생각이 들게 할만큼 비로소 개체인 '나'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참으로 뒤늦게 얻게 된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늙는다.
그러나 이 질서에 순응하며 지혜롭게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은 더없이 숭고한 아름다움이다.
인생의 황혼에 들어서서 돌아갈 때를 깨닫고 늦게나마 내가 온 곳을 생각케 되는 것도 쑥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이것도 분명 은혜일 것이다.
나만을 위해, 나의 것들을 위해 수고하고 애쓰다가 저만치서 어둠이 몰려오자 돌아갈 곳을 생각하는 것을 어리석다고만 할 것인가.
며늘아기가 원망스럽고, 아들녀석이 서운한 것 이상으로 어쩌면 그들이 인정해 버린 것들을 나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일 지 모른다.
은빛으로 빛나는 나래를 자랑스럽게 펼친 새 한 마리가 푸른 창공을 유유히 날고 있다.
꾸우어 꾸우어 하는 새의 소리가 바람결에 실려 사방으로 흩어진다.
남은 날들을 위한 또 한 번의 새찬 출발일 듯 시원스레 나는 모습이 한껏 아름답다.
김 노인의 가슴에도 새의 가슴으로 불어온 신선한 바람이 가슴 가득 담기는 것 같다.
'아직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지난주일 교회에서 만난 칠순의 문 장로가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하던 말이 생각난다.
햇볕 따스한 겨울 동짓달 한 날의 오후에 김 노인은 모처럼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본다.
오그라들었던 모든 뼈마디들이 일제히 잠을 깨며 살아나는 것만 같다.
순간 아들과 며늘아기가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이가 든 채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환영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손주 녀석의 '할아버지, 다녀왔습니다' 하는 목소리가 아침 이슬 마냥 투명하고 맑다.
책상 위 사진틀 속에서 아내도 수줍듯 웃고 있다.
참 따스한 겨울날의 오후다.
최원현(崔元賢)
국제펜클럽. 한국문협 회원. 한국수필문학진흥회 이사. 허균허난설헌문학회 이사.
강남문인협회 수필분과회장. <한국수필>과 <건강과 생명> 편집위원.
허균문학상과 서울문예상을 수상했으며,
수필집 <날마다 좋은 날>, <아침 무지개가 말을 할 때>, 시집 <아름다울 수>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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