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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류인혜 |
날짜 : 03-11-25 22:12
조회 : 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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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이야기(4) - 큰 나무의 기억
류인혜
나무 이야기를 쓰면서 이미지로만 있던 여러 나무에 대한 생각을 구체적으로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숨을 쉬면서, 밥을 먹고살면서 당연한 일로 여기듯 나무에 관한 일도 그랬다. 그것에 대한 절실한 무엇을 생각할 틈도 이유도 없이 그냥 함께 지내왔다. 돌아보니 주변에 얼마나 많은 나무친구가 있는지, 무심했던 것이 미안할 정도로 나무는 내 생활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자연과 더불어 살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누구나 나무에 대한 추억을 지니고 있다. 집안에 심겨진 과실수를 비롯하여 마을 곳곳에서 그늘을 드리우던 나무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나무들이 우리에게 친근해져 있음을 이야기 할 수 있다.
특히 다니던 학교의 교정에서 만났던 수많은 나무에 대한 기억은 언제 떠올려도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우물곁에 서 있었는데, 햇살이 뜨거울 때 오후반이 되면 그곳에 모여서 오전반 아이들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또 운동장에서 수업을 할 때는 한 반 아이들이 모두 그 밑으로 들어가도 그늘이 남았다. 은행이 익어 떨어지면 짓궂은 남자애들이 냄새나는 은행 알을 주워와서 여자들을 괴롭혔다.
은행나무는 학교의 명물이 되어 졸업한 후에도 나무에 대한 이야기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은행나무는 언제나 그 곳에 묵묵히 서서 입학생을 반겼고, 졸업생을 보내면서 같은 학교의 동창이라는 정신적인 구심점이 된 것이다.
그림을 그리던 중학교 시절, 3년 동안에는 더 많은 나무를 보았다.
나무는 풍경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훌륭한 배경이 되어 늘 곁에 있었다.
여중학교의 교문을 들어서면 운동장이 시작되는 곳까지, 오른편에는 정구장이 있었고 왼편에는 잔디밭이 조성되어 잎이 넓은 플라타너스 나무가 양쪽으로 도열해서 반겼는데, 깊은 가을날에는 무수히 떨어진 잎사귀들이 그 길을 덮었다. 바람이 나뭇잎을 휩쓸고 다니면 가슴이 저렸다. 음악선생님께서는 넓은 잎사귀를 주워 책상 설합에 넣어두셨다. 그것이 너무 낭만적으로 느껴서 우리도 낙엽을 주워 집으로 가져갔지만 금방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정구장과 운동장이 구별된 얕은 언덕에도 나무가 무성했다. 오래된 나무줄기는 서로 어긋나며 옆으로 길게 누운 것도 있어서 체육시간에 실증이 나면 가끔 그곳에 올라가서 몸을 숨기기도 했다.
그 나무들을 그렸다.
나무줄기의 색깔을 더 자세히 표현하려고 나무를 바라보는 시간이 갈수록 길어져 마음에 고민이 되었다. 도저히 그 자연스러운 색감을 나타낼 수가 없어서 안타까웠다.
읍내의 나무가 많은 곳을 찾아다니면서 그림을 그렸는데, 특히 군청 앞뜰의 버드나무는 일품이었다. 잘 자란 나무가 어떤 것인지를 나타내듯 튼튼한 줄기가 아름을 넘었고, 가지 또한 잘 뻗어내려 지금까지 그만한 풍채를 지닌 버드나무를 구경하지 못했다.
능청거리는 나무 가지 밑에 이젤을 세워놓고 있으면, 군청의 직원들이 나와서 한 마디씩 농담을 던져 그것의 재미도 여간이 아니었다. 어른들의 세계로 진입을 한 듯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흡사 잘 차린 밥상을 받아놓고 앉았는데, 좋은 음악을 곁들인 포만으로 늘 즐거웠다. 버드나무만 보면 그 풍성하던 분위기가 떠오른다.
어린 날에 만났던 나무들은 모두 엄청나게 커서 평범한 일상에서 얻지 못하는 풍족의 의미를 알게 해주었다.
2001. 1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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