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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류인혜 |
날짜 : 03-11-25 22:07
조회 : 3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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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이야기(1) - 할아버지 나무
류인혜
가까운 분이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가져온 나무 십자가 하나를 선물로 주셨다.
나무에 돋아난 가시의 자국을 그대로 살려서 다듬었기에 뽀족한 돌출이 여러 개 올라와 있다. 손바닥에 닿는 느낌이 아프다. 십자가는 문득 할아버지의 송곳을 연상 시켰다. 그것은 젊은 날의 인간에 대한 상실감과 신뢰를 한번에 말해 주는 상징으로 마음에 남아 있는 물건이다.
무엇에 대한 상징은 사람의 영혼을 풍족하게 만들어 준다. 상징이 되는 물건을 많이 지내고 있는 사람들은 그것들이 간직한 이야기를 소중히 여겨서다.
고향을 떠나오면서 그곳과 연관된 것을 지니고 싶은 마음으로 들고 온 것이 할아버지께서 쓰시던 송곳이다.
왜 하필 그것을 들고 왔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그 당시에는 꽤 심각한 결정이었던지, 첫번 째 방학 때에 고향으로 내려가 몇달이 지난 그때까지도 할아버지께서 수십 년 동안 사용하던 것이 없어져서 아쉬워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시침을 떼고 가만히 있었다. 그것도 재물이라고 욕심이 더 생기며 '저렇게 찾으시는 귀한 물건을 내가 보관하기를 잘했지'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래 사용하여 세월의 손때가 묻은 송곳의 손잡이는 투박한 나무 조각이다. 할아버지께서 직접 만든 것이라 두리뭉실한 모양으로 손에 잡기만 편했지 아무런 특징도 없어, 작은 나무 뭉치라는 것이 더 어울린다. 할아버지께서는 그 끝에 달린 날카롭고 뽀족한 것으로 여러 일을 하셨다. 가끔 사랑에 들리면 등을 꾸부정하게 굽히고 돋보기 너머를 집중하시며, 송곳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기에, 마음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할아버지를 기념하기 위해서 앞으로 지니고 있을 정표로는 그것이 가장 적당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객지 생활의 외로움이 깊어 가족들이 몹시 그리워질 때, 송곳의 손잡이를 가만히 잡고 있으면 나무의 부드러운 질감이 마치 할아버지의 손을 잡은 듯 따스했다. 그것은 고향을 상징하고 가족을 대신하는 듯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할아버지의 송곳은 단순히 연장이 필요할 때에 사용하는 생활도구가 아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큰 나무로 사셨다. 동네어귀에 심겨져서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어느 나무처럼 우리 집의 한 중간에 세워진 커다란 나무이셨다.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만들어 주는 마음 그늘의 깊고 옅음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분이 지녔던 삶의 크기도 함께 알아채서, 세상에 계시지 않은데도 대책 없이 기대어 있던 나의 정신적인 어리광을 이해했다. 늘 그분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나무의 넓은 그늘 밑에서, 튼튼한 줄기 옆에 기대어서 쉬고 싶은 간절함의 표시였다.
그렇게 마음의 고향으로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무성한 가지와 잎을 지니고 있어서 편안한 그늘을 이루는 넓음을 원했다. 심성의 뿌리가 깊어서 언제 어느 때나 무거워진 몸을 기대어 쉴 수 있는 든든함이 그리웠다. 또 침묵의 여운이 길어서 무슨 말이든 묵묵히 들어주고, 만나서 쳐다보기만 해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사람을 찾았다. 그런 사람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완벽한 사람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후로는 살아있는 실제의 나무에게로 마음을 돌렸다.
묵묵히 큰 나무가 무리 지어 서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나무를 바라보면 알 수 없는 기운이 전신으로 가득 차 왔다. 편안해지고 마음이 넉넉해져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부드러워졌다.
가장 좋아하는 나무의 형상은 넓은 들에 홀로 서있는 고목이다. 고목은 그 살아온 세월의 나이로 사람을 압도한다. 나이가 많이 든 나무의 곁에 서면 할아버지를 만난 것처럼 든든하다. 나이만큼 나무도 베풀어주는 마음이 넓어서 무한정이다.
그래서 크고 곧게 자라난 나무는 사람에게 유용하게 쓰인다. 줄기는 가구를 만들거나 집의 기둥과 대들보가 되고, 나뭇잎은 약용이 되거나 거름으로 쓰이고, 열매는 사람들에게 식용된다. 여름에는 그늘을 이루어 사람들을 쉬게 하고, 바람이 많은 해변에서는 좋은 방풍막이 되어준다. 다른 쓰임새도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그리고 때로는 그를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을 거쳐서 작은 십자가로나 쉽게 쓰는 연장의 손잡이가 되어 우리의 일상에 있다. 나무는 또 다른 생명을 지닌 채 사람의 마음에 들어와 하나의 상징으로 머무는 것이다.
2001년 10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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