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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수필 10

잉카와 나방

류인혜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한국판을 구독한 것은 몇 년 전이다. 오랫동안 호기심을 갖고 있던 잡지를 받아 읽으며, 전문가들이 잘 찍은 사진들로 인하여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낭만적이기까지 한 호사를 누리면서 지냈다. 이따금 그리운 추억을 떠올리듯 과월호를 꺼내 들추어 본다.

마침 느긋하게 커피 한 잔 마실 여유가 있던 주말 오후다. 오늘은 꼼꼼히 살펴봐야지, 하며 책을 받아서 접힌 그대로 무심히 꽂아 두었던 부록종이를 펴 들었다. 딱 한번 펼친 푸른 빛 배경에서 읽은 글씨는 <잉카 문명>이다. 큰 제목 밑에 '태양을 숭배했던 고원 도시 마추픽추'가 눈에 들어온다. 사진으로 가끔 대하면서도 평면적인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던 도시 전경이 눈앞에 있다.

이런 횡재가 있을까, 시벨리우스 교향시 <핀란디아>의 도입부를 듣는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다. 우아하고 장중하게, 서서히 파고드는 음률에 취한 듯 천천히 마추픽추, 잃어버린 도시를 재현한 그림을 살폈다. 높은 산을 지형 그대로 이용하여 질서정연하게 도시를 조성했던 그들은 생활방식도 과학적이다.

마을 왼편에 유일한 출입구가 층계 끝에 있고, 영지 밖에는 계단식으로 밭을 만들어 약초와 꽃, 옥수수를 경작했다. 인근지역에서 가져온 음식물을 저장했던 창고도 있다. 그들은 또 돌을 쌓아서 수로를 만들었다. 길이 25m 수로에 여러 개의 분수가 있었다. 물이 수로를 따라 흘러 와 분수에 모였다가 다시 수로로 흘러가도록 물 귀한 고원지대에 적절하게 사용했다. 돌담 사이에 삼각형 모양의 초가지붕 집들이 다정하다. 신성한 마당 뒤편에는 여러 층으로 계단이 나 있어 인티와타나로 향한다. 태양을 숭배하던 그들은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거대한 돌 하나를 주변 산세와 같은 모양으로 깎아서 해시계로 만들었다. 그 기둥이 보이지 않는 줄로 태양을 묶어 둔다고 믿었다.

아득히 멀었던 미지의 세계가 세월과 공간을 넘어 바짝 당겨진 흥분이다. 그림을 보고 있지만 실제로 현장에 서 있는 듯한 현실감에 감격하여 이상하게도 코가 매워진다. 잃어버렸던 조상의 한 핏줄이 이곳으로 건너간 것일까. 지구 곳곳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닥아 올 시대까지, 모든 사연이 한데 어우러져 다가온다.

그림을 접고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펴들었다. 기쁘게도 거기에 실린 모든 사진이 한 장, 한 장면마다 평소에 기대하고 있던 사진에 대한 견해와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을 준다. 잘 찍은 사진은 사물을 직접 보는 것보다 더 아름답다.

이 책에서 특집은 나방이다. 온갖 나방이들이 지면 대부분을 점령하고 있다. 나방에 푹 빠져 3년 동안 1000종의 나방을 만났다는 예술가 '조지프 시어'가 아름다운 그 모습을 디지털 이미지로 재생해 놓았다. 그는 나방을 잡아 스캔하여 모니터로 혹은 프린터로 옮기면서 가장 실물과 가까운 이미지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나방사진은 날개를 아주 정밀하게 묘사하여 미세한 털이 정말 보송보송 솟아난 느낌을 준다. 인간이 이루어놓은 과학의 기술이 자연을 능가하는 현상을 확인한다.

색체가 이룰 수 있는 한 현란한 세계를 나타내어 곤충나방을 예술적 작품으로 치장해 놓았다. 나방의 색깔이 눈으로 볼 때보다 디지털로 형상화 한 이미지의 색감이 더욱 선명하게 잡히는 것이다.

루나산누에나방은 7.5cm에서 10cm에 이르는 날개가 초록빛이다. 몸통은 흰색이고, 미모사 잎같이 잘라진 더듬이를 가졌다. 미니아타이끼밤나방이라는 이름을 얻은 놈은 진분홍 몸매에 노랑과 회색, 분홍으로 색동이 된 날개를 가졌다. 더듬이는 호박덩굴에 새로 돋은 순의 끝처럼 매력적으로 말려 있다. 아프록시멜라명나방도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가졌다. 잠자리 날개같이 특이한 모양의 날개를 가진 엑티오사유리날개나방은 몸체도 검정이다. 나방이의 이름이 길어서 그 오묘한 색깔처럼 난해하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방은 회색빛 태극무늬 나방이다. 여름 날, 마루에 앉아 있으면 전기 불이 있는 곳으로 날아와 파드득거렸다. 나방이는 사람에게 해로운 분진을 몸에 지니고 있다. 그 분진이 떨어질까 어찌하든지 잡았는데, 새삼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을 다시 읽으면서 오랜만에 좋은 경험을 한다. 잉카문명은 자연을 사람의 힘으로 다듬어 놓은 신비로움이지만 나방의 아름다움은 자연이 만든 예술성이 높은 작품이다. 그것을 과학이 지닌 힘으로 한 단계 더 자세하게 표현을 해두었다. 

마음으로 바라고 있던 완벽함이란 의미가 높은 전문성으로 와서 닿는다. 평범한 사람들은 그것을 추구하는 일부 사람들로 인하여 알지 못하던 세계로 들어가는 혜택을 누린다. 마음을 지나 정신까지 만족시키는 깊은 감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감동은 예술작품이 존재하는 이유이다.
어느 주말 오후, 일상을 떠나 먼 세상에서 잠시 머물다 왔다.(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