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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주안 |
날짜 : 07-11-28 15:22
조회 : 1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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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하나 파는 일로
이 상 인
내게 있어 글을 쓴다는 일은 메마르고 숨 가쁜 삶 속에서 신선한 샘 하나 파는 격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수필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 성찰이기도 하고 얼룩진 생활의 여적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드러나는 그 성찰이 만에 하나라도 미흡하고, 그리고 샘을 파는 그 노력의 일단이 흐리다면 당연히 맑고 시원한 물을 얻어 마실 수가 없을 터이다. 어쩌면 이 물은 생명의 근간이요 목숨줄일 수도 있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과정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는 나의 글쓰기 작업은 쓸 때마다 어떻게 써 나가야겠다는 것보다 무엇을 써야 할 것인가에 더 신경을 쓰게 된다.
‘어떻게' 보다는 ‘무엇'에 더 고심하게 되는 나의 작업은 바꾸어 말하면 주제나 소재에 더 집착하게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나를 어두운 잠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새벽의 찬 공기나 신선한 바람에 비유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침 일찍 새벽바람을 쏘이며 매일같이 눈을 뜨는 말하자면 죽음으로부터 깨어나는 이 반복적인 행위는 내 삶의 출발이 되어 준다.
어둠 속의 잠으로부터 일어나 여명을 대하는 새벽은 얼마나 새로운 날들을 나로 하여금 맞게 하는가. 얼마나 값진 시간을 내게 주고 있는가. 그것으로 나는 얼마나 소중한 삶을 향유하게 되는가.
그렇듯 한 편의 나의 수필은 그것을 쓸 때마다 새롭고 무거워야 하며, 얼마만큼 진지하게 얼마만큼 성실하게 대해야 하는가를 거듭 생각케 한다.
다시 말하면 그런 의식으로 작업된 글의 참값은 가장 자기다운 자신을 발견해 내는 일에 있으며 그 스스로를 숨김없이 그려 내는 일에 목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장된 것은 버리고 구정물로 더렵혀진 자아는 말끔히 씻는다는 관점에서 맨몸뚱이를 내세워 마치 동심어린 원초적 세계의 자아와 순수무구의 원천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세계가 되도록 하는 일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스스로의 이런 각오가 내 삶의 주축이 되고 내 글의 재목(材木)이 되어, 한 편의 수필이라는 건축물이 완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갖은 풍상에도 거뜬히 견딜 수 있는 집, 확고부동한 초석에 그 터전을 마련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보다 빛나 보이게 다듬는 일. 그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들이 아니겠는가.
그러노라면 의당 거기 각고가 따르기 마련이다. 피나는 노력 끝에 빚어지는 글이어야만 보다 진지하고 자애로운 것이 되는 법이다. 자애롭고 자유로운 글은 그 속이 깊다. 안으로 깊어야만 많이 담고 거둬들이는 것이 푸짐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나 자신의 아픔과 치부, 그리고 여러 가지 역겨움마저 고스란히 드러내 놓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들을 순화시켜 오히려 공감과 즐거움을 동반케 해야 한다는 의무마저 곁들여져 내 고통은 한층 더 두드러지게 된다.
웃음을 던져 주는 희극 배우, 그가 더 웃을수록 그 자신의 가슴 안에선 슬픔과 서글픔이 크게 불어난다는 사실, 엄청난 아픔을 그 가슴에 묻을 때만이 청중에게 진정한 해학을 던질 수 있다는 원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수필 문장의 공감도 역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희극 배우의 위장술처럼 눈물이 웃음으로 변화되고 분해되고 분장되는 데까지 이르러야 문장의 참맛이 생기는 것이다.
이런 매력, 이런 진의 때문에 수필은 쉬운듯 하면서도 매우 고차원적인 것이 된다. 가상의 인물이 아닌 실제의 나, 나의 주변과 살붙이, 그리고 내 친지들이 우리라는 큰 테두리의 내적자아를 형성해서 보다 근원적으로 깔끔하게 그 성격을 이루어 설득을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기에 부끄럼도 따르고 아픔도 갖기 마련이다. 그것을 동반하는 과정이 어렵고 힘들므로 수필은 진행될수록 난감해지는지 모를 일이다. 어느 때는 나를 미로 속에 던져두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얼마를 더 헤매다녀야 할지. 어디까지 나가야 동트는 새벽에 닿는지, 어찌 생각하면 불안하기조차 하다.
나와 같은 재주 없는 사람은 그 막연과 모호 앞에 놓인 장벽에 기대어 서 있는 기분이다. 그 분위기를 저버리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여느 사람의 보편적인 태도가 아닌 나만의 하늘, 나만의 뜨락, 나만의 시선과 시력, 그래서 나만의 상상력과 사고력을 지닐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내가 쓰는 글 가운데 금기 사항으로 꼽는 것은, 몇 번을 옮겨 거듭 쓴 것이라 할지라도 이미 수없이 써 왔던 남의 얘기는 삼가는 일이다. 이런 것은 마치 복사판에 대고 민 듯한, 또는 팩시밀리를 통해 받아 읽는 거부마저 주기 때문에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허상만인 것으로 겉껍질만 커다랗게 보이는 허장성세의 철학적 사변이다. 이들 대부분은 아름다운 이름만 뒤집어 쓴 반 인간주의나 다름 아닌 것으로 망라되었기 십상이어서 나로선 조금의 애정도 느낄 수 없어 외면하고 있다.
반면에 풀잎같이 작고 가녀린 사연일지라도, 비록 하찮은 신변잡기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거기에서 인간적인 냄새가 짙고 사랑과 참모습이 어우러지는 사실이 발견된다면 얼마든지 찬양하고 흠모해도 좋다는 생각이다.
내 나름의 수필, 그런 이해 아래 내 글을 쓴다는 것은 내 나름의 삶을 익히며 될수록 긍정적인 태도의 인생을 사는 방법이라 여겨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론이나 철학적 체계를 갖추어 쓰기보다는 느낌 같은 것이 저절로 다가와 내 피부를 뚫고 내 가슴 깊숙한 데로 들어와 나를 흔들어 놓는 것에 나의 자유로운 상상력을 맡기고 싶은 일, 이것이 나의 모두이다.
이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는 곧 절실함이다. 그 어떤 구속으로부터도 나를 해방시키는 노력의 경주가 즉 나의 글이요 나의 수필인 셈이다.
더러는 예상 외로 작품화의 과정에서 진통도 겪게 된다. 서술에서도 그렇지만 제목 붙이기에는 더욱 그렇다. 때로는 제목이 먼저 설정되어 마음의 벽에 붙이고 온갖 이미지를 동원해 전개해 나가기도 하지만 그 역순이 될 때도 간혹 있다.
아무튼 글쓰기 작업이 너무 힘겹고 그 진통이 도가 지나칠 때마다 어느 철인의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 닿는다.
“피로서 써라. 그러면 그대는 그 피가 정신임을 알리라."
더한 신명으로 나는 내 글을 쓰고자 한다. 이 피를 다 해 마른 땅에 샘 하나 깊이 파겠다는 일념으로 수필을 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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