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때 오목한 내 방이 생각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속옷이 이슬비 맞듯 시나브로 촉촉해지고 공기가 박하사탕마냥 화해지며 기분이 상쾌하다.

포근한 남정네의 품에 안기듯 살맛이 난다. 그리고 폭삭 주저앉고 싶던 답답증에 숨통이 빠끔 뚫린다.

운동이라고는 그야말로 숨쉬기밖에 못하던 내가 어디서 떳떳하게 등산이 취미라고 말할 수 있게 된 지 어언 10년이 지났다 창문을 열면 코앞에 누워있는 북한산 줄기가 유혹하기 때문이고, 선천적으로 허악한 관절 탓이리라.

20대 후반부터 아프기 시작한 내 무릎, 직장이 하루종일 서 있는 직업이라 그 고통은 참기 힘들었다. 수업하다가 통증이 심하면 엉덩이 걸칠 한 뼘의 땅을 찾기 일쑤였다. 그래서 소지품에는 보자기가 필수였는데 정 아프면 어디서나 발뻗고 주저앉는 게 주 용도다. 마치 억울한 일을 당하고 넋이 빠진 여인네처럼......

백약이 무효라고 이열치열 격으로 마지막 수단이 등산이었다. 그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실패를 거듭하였던가. 몇 년전부턴가 산은 이런 날 가상히 여겨 산사람의 반열에 끼워 준 것이다.

얼마 전 수영에 다시 도전해 본 적이 있다. 대학생시절 친구끼리 동해안에 갔다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바람에 창피를 당한 이후다. 이번에는 자신감을 가지고 재도전하였으나 역시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그때 나도 모르게 역시 나는 산에나 가야지 하는 재확인이었다. 물이 지나치게 화사하고 말랑말랑하여 믿음이 가지 않은 반면 산은 변함이 없어 좋다. 늘 거기 있는 산봉우리, 거기 있는 바위와 나무들, 갈고리 같은 뿌리로 비탈진 곳에서 땅을 부여잡고 있는 소나무 모습에 안도감이 인다. 이 세상 어딘들 이렇듯 변함없는 것이 있을까. 하루에도 열두 번 변하는 내 마음과 시속, 내 곁에 영원히 있을 것 같던 부모님의 하루하루 변해가는 모습에 심란하다.

나에게는 산친구가 많다. 헌칠하고 미끈한 신사풍의 느티나무, 만지막 거리면 생강내음이 나는 생강나무, 볼품없지만 거친 땅을 비옥하게 하고 꿀로 야생동물에게 덕이 되는 조록싸리, 이밖에 작살나무, 국수나무, 노린재나무 등 나에게 모두 스승격이다. 나는 이들을 통하여 내 삶을 가다듬는다.

한 시간 남짓 걸어 용바위를 지나 모퉁이에 야트막한 구릉이 보인다. 언제부터인가 내 자리로 점 찍어두고 잠시 앉아 숨을 돌리는 곳이다. 너럭바위에는 회사의 부장 정도가 앉을 만한 등받이가 되어 있고, 사방으로 진달래가 담을 두른 듯 고향냄새가 물씬 풍긴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나만의 자리다. 오늘도 나는 여기에 나를 오롯이 맡긴다. 그리고는 상념에 젖어들었다.

어린 시절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 나는 살아남기 위해 눈치보기 자리다툼을 하였다. 그 후 한때는 동료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로 자책을 하고 더러는 섭섭해하며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전철이나 버스만 타도 내 자리를 만드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정상인 대동문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다. 나는 오늘도 삼거리와 진달래 능선을 지나 외길인생인 양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헛된 생각을 하면 돌부리에 채이기 일쑤다. 오직 진실하고 올곧은 마음만이 다다를 수 있다

산 정상에 오르면,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자랑스럽다. 낙원에 온 듯 마음이 편안하기도 하다. 가파른 바위라는 세파를 이겨낸 나, 그야말로 자긍심이 온몸을 휩쓴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자기 강화라고 하던가. 여기에서는 은근히 부러워지는 상대도 없고 후회할 일도 없다. 온갖 곳에 받친 상처는 치유되어 온전한 나 자신만이 있을 뿐이다. 누군가는 교회나 절에 가서 영혼을 정화시킨다고 하지만 나는 숲 속에서 심신을 깨끗이 하고 삶의 겸허와 관용을 배운다. 사람을 피해 다니는 산 속의 다람쥐처럼 불안한 내 존재는 여기서 반듯하게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비탈길에 사람들이 붙잡아서 기름칠한 듯 반질반질한 나무 등걸, 마치 조약돌같이 길들여져 있다. 산에서 마주치면 '야호'하고 격려하는 사람들. 너나 없이 순박하고 친절한 이웃들이다.

곧 개학을 하면 이해와 양보보다는 온갖 사정과 이기심이 칡덩굴인양 뒤엉켜 있는 세상으로 나간다. 이런 와중에 일익을 담당하는 나. 더욱 부지런히 산으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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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다한 숙제 은행나무 한 그루가 노란 다발체로 보인다. 수천 번을 지나다녔으나 오늘 처음 눈에 띈 것이다. 그 우아함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오늘 다시 신호등 앞에 서 잇는데 바로 그 은행나무가 헐렁한 모습으로 말라 가고 있었다. 가슴이 나도 모르게 막혀 우뚝 서고 말았다.

얼마 전에 길거리에서 "순향아!" 하며 둥글게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가슴이 아리며 답답해졌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도 안되는 외삼촌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둘째 외삼촌이 가신 지 어언 일 년이 지났다. 남의 중병은 고뿔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듯 그 당시 나는 대학원의 논문에 매달리고 있었다. 다시금 능력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치맛자락을 무겁게 끌고 다닐 때였다. 삼촌은 그 즈음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 임종을 지켜본 이는 그의 가문처럼 쇠락한 두 누이뿐이었다.

외삼촌은 환갑이 넘었건만 정신 연령은 초등학교 학생 수준이다. 장안에서 손꼽히는 의사 집안의 아들이었건만 그처럼 태어나서 주변에 근심을 던져 주었다. 그러나 이런 외삼촌의 순수함은 조카들과 나이를 초월한 우정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라고 생각한다. 대가댁 마나님인 외할머니는 달덩이 같은 인물만큼 음식 솜씨도 대단하셨다. 무 또는 호박고지에 팥을 버무려 떡을 만드셨다. 그 즈음 할머니댁은 사대문안이었고, 우리 집은 변두리였는데 그 먼 길의 떡 운반은 외삼촌 몫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외삼촌이 매부리코를 들썩이며 떡보퉁이를 흔들고 오는 모습을 기억한다. 이런 삼촌의 등장은 무료했던 나에게 얼마나 신나고 즐거운 일이었던가. 외삼촌이 어머니에게서 용돈을 받고 기뻐하며 외가로 돌아갈 때면 배웅차로 따라 나섰다.

우리 집 근처 큰 길가에는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그곳을 지날 때면 물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는데, 빈 떡쟁반끼리 부딪치는 소리와 묘한 조화를 이루었다.

우리는 그 소리에 맞춰 " 유 째째는 거짓말쟁이, 사기꾼" 하며 노래를 불렀다. 유 째째는 막내이모 애인의 별칭으로, 행실이 나빠 외할머니의 미움을 샀던 사람이다.

외삼촌의 수집벽은 대단하였다. 그는 유달리 미제 물건의 신봉자로 미제 껌을 좋아하였는데, 그 질기고 쫄깃쫄깃한 맛이 구미에 맞았던 것 같다. 미제 손톱깎이와 칫솔, 치약 등 온갖 잡동사니들도 외삼촌의 뺄 수 없는 재산 목록의 일부였다.

그런데 이 미제 물건들은 그 당시 삼촌의 콧대를 마음껏 높이는데 큰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마침 둘째 이모가 미국에 있어 물건들을 부쳐 주었으며, 더러는 남대문 도깨비시장에서 구입한 것들이다. 기분이 좋을 땐 외삼촌은 이 미제들을 우리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결국 지병인 당뇨가 생긴 원인도 콜라나 초콜릿 등을 지나치게 좋아한 데에 있지 않았나 싶다.

외삼촌은 내 엄지발가락의 굳은살이었다. 허약한 다리 때문에 등산을 자주 다니던 나에게 굳은살이 박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난 애써 양말로 가렸다. 남들의 뽀얗고 귀티 나는 발과는 달리 거칠고 누르티티하여 유달리 안 풀리는 내 삶의 표본이 복종하는 발이 안쓰러워 어루만지곤 하였다. 외삼촌의 존재도 내 엄지발가락처럼 꼭꼭 숨기며 자랑거리로 대접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전화 한 통화면 꼭두새벽부터 등장하는 삼촌의 일은 은행 심부름부터 짐나르기, 증명서 떼어오기 등 전천후였다. 아무리 번거롭고 시간이 걸려도 충견인 양 마다하지 않았다. 대가로는 곰탕 한 그릇이면 그야말로 '팅 호야'였다. 이런 외삼촌의 존재는 내 인생의 고비마다 얼마나 큰 버팀목이자 방석이 되었던가. 그는 나를 비판하지 않았으며 온전히 섬겨 준 처음이자 마지막의 사랑이었다.

어느 날이었다. 무심결에 밖을 내다보던 나는 온몸이 오그라드는 충격을 받았다. 외삼촌이 길거리에서 셔츠바람으로 모래를 나르고 있었다. 가끔씩 돈을 번다고 자랑하여 잡일이나 하는 줄 알았는데 막노동을 하고 있었다. 땀을 흘리고 비틀거리면서 손수레를 끄는 모습은 비극의 주인공을 보듯 눈가를 스멀거리게 하였다. 그의 동생은 장안에서 유명한 대학교 총장이다.

이런 외삼촌이 결국 중병으로 누운 것이다. 나는 막연한 불안감에 빠져들었다. 아직 미혼인 삼촌이 어머니와 여러 사람에게 얹혀줄 부담감에 심란하였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그는 잠들 듯이 간결하게 가셨다. 흔해빠진 화환 하나 받지 못하고 그를 아는 모든 사람에게 아픔과 특별한 추억거리만을 남겨 준 채로......

가끔 나는 외삼촌의 삶을 돌이켜 볼 때가 있다. 단순한 그의 삶은 어느 면에서 행복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정상인이라는 반열에는 들지 못했지만,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이 시대에사는 누군들 스스로 온전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기만하다. 어느 시인도 우리들이 서로서로 하늘이 되어 주지 않는 한 장애인과 다름없다고 절규하지 않았던가.

반포지효(反哺之孝)라는 말이 있다. 까마귀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인데 은혜를 되갚는다는 말이다. 오만과 편견으로 뭉쳐진 나를 왕비마마인 양 무조건 받들어 준 외삼촌의 공을 한 가닥이라도 갚았는지 생각해 본다. 그저 발목이나 잡히지 않을까 전전긍긍한 내 이기심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 다시 한 번 한 줌의 흙으로 변한 삼촌의 분신이 주변을 떠도는 것 같아 둘러보게 된다.

산에 오르는 중턱에서, 중년을 넘은 아주머니가 오늘 숙제는 다했다며 절름거리며 내려온다. 등산은 그분의 건강을 찾기 위한 절박한 숙제였던가 보다. 그렇다면 나에게도 해결해야 할 숙제가 산적해 있다. 늘 이것들에 빠져 근심이 오락가락하건만 요사이 답답증이 유독 심한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아! 그것은 외삼촌이 나에게 남기고 간 숙제 탓이리라.

오늘 교무실로 새끼 곰을 연상시키는 준호가 들어왔다. 약간 모자라 늘 반복되는 잘못에 꾸중을 들으러 온 모양이다. 어딘가 덜 익어 보이면서도 옹크리는 모습이 외삼촌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나는 얼른 일어나 준호의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