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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이 완성되면 지은이 가나다 순서로 정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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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이희순 |
날짜 : 08-03-11 17:32
조회 :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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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촌 행 버스를 기다리는 오후 두시.
흰 두루마기가 잘 어울리는 노인이 다가와 남촌 가는 길을 물었다. 비석에 새길 글씨를 써주러 간다고 했다. 괴발개발 졸필로 한 세월 주눅 들어 살아온 나는 귀가 솔깃해졌다. 허나 자신은 명필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며 노인은 한숨을 쉬었다. 명필대접을 받으려면 벼루 예닐곱은 구멍 내고 모지라져 못 쓰게 된 붓 대여섯 독은 담아내야 한다고 했다. 내는 고작 벼루 서너 개 바닥내고 붓이래야 두어 동이 채웠을까나 하며 노인은 먼 산으로 시선을 옮겼다.
흥국사는 대웅전을 새로 지었다.
그런데 편액(扁額)을 써주기로 한 고인이 종무소식이었다. 낙성식(落成式)이 내일모레라 주지스님은 빈 편액을 달아놓은 채 좌불안석이었다. 정작 신필(神筆)이 따로 있었으니 사하촌(寺下村) 백정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상것’한테 ‘대웅전’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양반가를 비롯한 많은 시주들이 두고 볼 리 없었다. 아무튼 수를 내야 했지만 묘안이 없었다. 흥국사는 백정한테 몰래 기별을 넣었다.
떠꺼머리총각은 낭창거리는 왕대 사다리에 의지하여 붓을 들었다. 새소리도 멈추니 사방은 경건한 고요 속에 잠겼다. 그가 일을 마무리할 무렵 기어이 사단이 났다. ‘상것’이 필묵을 챙겨 절에 갔다는 소리를 들은 사하촌 사람들이 떼거리로 몰려온 것이다. 스님들이 말릴 틈은 없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달려들어 긴 사다리를 밑동에서부터 잡아채버렸다. 건장한 젊은이가 40척 공중에서 쑥돌 바닥으로 내떨어지면 어찌 될지는 불문가지였다. 그러나 사다리가 빠져나가는 순간 그는 잡고 있던 붓을 들어 편액을 찍었다. 붓은 깊숙이 박혔다. 그는 그렇게 한 자루 붓대에 의지하여 허공에 있었다. 이 불가사의에 중인(衆人)은 오히려 놀라 부르짖었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글씨 잘 쓰는 사람이 칙사 대접을 받았다. 보고서건 현수막이건 손으로 쓰고 그리던 시절이었다. 글씨 이야기만 나오면 몸을 움츠렸던 내게 다행히 시대가 한 부조했다. 갑자기 컴퓨터 세상이 온 것이다. 신바람으로 조급해진 나는 두 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들겨댔다. 소위 ‘독수리타법’이다. 이 독수리타법은 벼락치기에 익숙해온 내 인생의 함축이다. 꽤나 긴 세월 속에 남겨진 허다한 내 발자국 어디에도 오래 참음으로 치열했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꽃다운 소녀 김연아가 빙판 위에서 보여주는 몸짓에는 혼이 깃들어있는 듯하다. 많은 스님들이 법당에 모여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난해한 불경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독송(讀誦)한다. 다시 치열함과 오래 참음을 생각한다.
비록 고인에게 사사(師事)하지는 못했으나 문방사우를 가까이했던 선배님. 흥국사 대웅전 편액에 얽힌 비사(?)를 들려주던 노 선배는 바닥난 벼루 두엇 쯤 간직하고 있을까. 남촌 가는 길을 묻던 노인은 붓을 왼손에 옮겨 잡고 다시 몽학(蒙學)의 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인생역정에는 본시 종지부가 없었다는 사실을 기어코 알아냈을 터이다.
남촌 행 버스 정류장은 옛 모습을 잃었지만 여전히 그곳에 있다. 괴발개발이며 독수리타법을 어쩌랴. 내 이제 노인의 흰 두루마기차림이라도 흉내 내어 새 길을 묻는다. 사람의 속에 ‘영원(永遠)’을 새기는 석수장이가 살고 있다는 마을에 이르는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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