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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이 완성되면 지은이 가나다 순서로 정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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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정동호 |
날짜 : 08-03-11 17:31
조회 : 2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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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소 판 돈
정동호
벌써 30년도 더 지난 일이다. 그 날은 하동 장날이었다.
모내기를 마치고 농번기가 끝나면 소를 몰고 장에 가는 사람들이 많다. 논갈이 때에 요긴하게 부려먹은 농우를 팔아 빚을 갚거나, 송아지로 바꾸어 이문을 좀 남기기 위해서다. 하동 쇠전은 1년 중 이때가 가장 붐빈다. 아버지도 그날 쯤 소를 팔겠다는 이야기를 며칠 전 하신 바 있다.
오후 서너 시 쯤 되었을까. 하동 경찰서에서 아버지의 떨리는 음성이 전화기를 타고 왔다.
마침 인근 지역에서 근무하던 때라 오토바이를 타고 10여km 길을 단숨에 내달았다. 경찰서에 들어서자마자 하얀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앉아 있는 아버지를 보았다. 넋을 잃고 창문을 향해 먼 산을 바라보며 침통해 하시던 그 모습은 차마 보기조차 민망하였다.
4km 거리를 소를 몰고 걸어와 쇠전에 들어섰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시세를 알아본 뒤 거간꾼과 흥정을 거듭한다.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씨름한 끝에 소를 팔았다. 근년 들어 손에 쥐어보는 큰돈이다. 한 시간도 못가 남의 손으로 넘어가야 할 돈이지만 우선은 부자란 생각을 해 보았다. 두툼한 돈뭉치를 조끼 안 호주머니에 단단히 넣고 수시로 확인해 본다.
“성님 그 돈 언제 갚을라요”
“조금만 더 참아 주개, 소 팔거들랑 꼭 갚겠네.”
몇 차례 약속을 어겨가며 오늘을 기다려 오던 터였다. 이제 소를 팔았으니 빚을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평소에는 늘 걸어서 다니던 길이지만, 모처럼 큰돈을 지녔고 소 값도 기대이상으로 받았기에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하동장날 버스정류장은 늘 북적댄다. 밀고 밀리고 부딪쳐가며 틈바구니를 비집고 버스를 탔다.
지난 2년간 자식처럼 키워오던 그 소에 대한 연민의 정을 잠시 생각한다. 중송아지를 사와 큰 소가 되기까지 쏟은 노력이 얼마던가. 섬진강 백사장에 나가 쟁기 끄는 일을 가르칠 때 앞에서 코를 끌던 당신의 할멈과 셋이서 씨름은 얼마나 했던가. 당당한 농우로 길들여 금년 다섯 마지기 모내기를 잘 마무리 시켜준 소였다. 기름도 반지르르하게 흐르는 임신 3개월에 접어 든, 정말 팔기 아까운 소였지만 빚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애지중지 키워 온 그 소를 팔아버린 허전함, 무언가 잃어버렸다는 허탈감에 빠져 있는 순간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 했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에 들어서다가 마침 그 빚쟁이를 길가에서 만났다. 평소에는 가급적 피하고 싶었던 사람이지만 오늘은 당당하게 만날 수 있었다. 빚을 갚는다는 생각에 없던 자신감도 생겼다.
“이보개 동생 오늘 소를 팔았내. 돈 갚음새”
그리고 두루마기 속의 조끼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순간 손에 전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차츰 얼굴색이 변하며 정신없이 여기저기 뒤지다가 조끼 호주머니가 칼에 째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순간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버스를 타려할 때 두 세 청년이 좀 별스럽게 밀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무심코 넘겨버린 일이다.
채주를 길가에 그대로 세워둔 채 혼 나간 사람처럼 말없이 발길을 돌렸다. 귀신에게 홀린 듯 십리 길을 되돌아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시 나의 월급은 10여만 원대, 사글세방에 생활비도 어려운 형편을 당신도 잘 아신다. 그럼에도 소 한 마리 사 주면 좋겠다고 부탁해 아들 내외가 사준 소였다. 더구나 당신의 며느리가 하동 시장가에서 작은 가게를 차려놓고 밤잠을 설쳐가며 편물기와 씨름하여 어렵게 모은 돈, 그 돈으로 송아지를 사서 농우로 키워낸 소가 아니던가.
당장 갚아야할 빚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하였다. 아들과 며느리를 어떻게 만날까 생각하니 현기증이 났다.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하 답답하고 다급하여 미친 사람처럼 쇠전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정신없이 쏘다녔지만 무엇을 어쩐단 말이냐. 경찰서에 가보았지만 한번 잃어버린 돈을 어찌 찾을 수 있겠는가.
경찰서에서 조서를 받다가 나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야야! 이 일을 어짜모 좋컸노, 소 판 돈을 몽땅 잊어삐맀다.”
조서를 받던 경찰관의 이야기다. 그 당시 하동 장날은 진주 구례 순천 등지의 원정 소매치기들이 판을 친다고 했다. 특히 쇠전은 그들의 주 무대인데 장날이면 아침부터 쇠전머리에서 거간꾼이나 소 살 사람 행세를 하며 소를 몰고 오는 사람들의 뒤를 밟는다고 한다. 주로 촌 노인네들은 그들의 밥이란다. 소가 거래되고 돈뭉치가 오가는 것을 확인하면 끝까지 따라 붙다가 사람들이 많이 붐비는 곳에 이르면 일을 친다고 한다. 실수인 척 몸을 밀치는 순간 돈은 이미 내 호주머니에 없단다.
근근이 생계를 꾸리며 어렵사리 살아가는 판에 소 판 돈까지 날려버렸으니 그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 그 일이 있고난 뒤 2년여쯤 지나서 아버지가 쓰러진 일이 생긴 것도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소 한 마리,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니지만 그때 아버지가 받았을 충격과 슬픔을 돌이켜보면 지금도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보개 동생 오늘 소를 팔았내. 돈 갚음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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