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다니던 직장을 명예퇴임으로 그만 두었다. 재작년에 막내딸까지 시집을 보내고 나니 허전하고 쓸쓸함을 달랠 길이 없었다. 가족이라곤 남편밖에 없는데, 그는 가장의 권위를 내세워 아내 위에 군림하려는 보수주의적인 사람이다. 그에 비해 난 시대감각에 빠르게 적응하는 성격을 지닌 편이다. 우리는 간간이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기도 하였다.

어느 가을날, 우리 부부는 친구들과 여행하고 돌아와 친구 집에서 놀다가 밤중에 집으로 오게 된 일이 있었다. 남편은 딸한테 우리를 데리러 오라고 연락을 하라는 것이다. 나는 그 사고방식이 좀 못 마땅했다. 영재 교사로 주로 오후에 일을 하는 딸은 늦게 귀가해 피곤할 터인데, 밤중에 차 끌고 오랄 것이 뭐 있느냐고 반대했다. 친구의 차를 빌려 타고 오면서 남편은 나에게 잔소리를 퍼부었다. 자식교육을 잘못 시킨다며, 남편 말을 우습게 안다고, 친구 부인 아무개 같으면 그랬겠느냐고 불평을 털어놓았다.

남의 부인 들먹이며 나무라는 바람에 발끈 화가 났다. 둘만의 공간에서 우린 음성을 높였다. 분하다는 생각에 흥분된 감정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교역자로 목회하는 남편이라, 부부싸움도 맘놓고 못해본 우리가 큰소리로 시시비비를 따졌다. 그 일로 기분이 몹시 상하였는데 잘잘못을 거론 않고 지내자니 우리는 서서히 거리가 멀어졌다. 사과도 않고 다독거리지도 않는 남편이 싫어졌다. 난 외로움을 느꼈다. 내 잘못이 없으니 먼저 수그러질 이유가 없다. 그 일로 갈등이 고조되었을 때에 딸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 후 나에겐 새로운 애인이 생겼다. 나는 집에 있는 시간은 애인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에게 응석도 부려보고 투정도 해보고 내 마음에 쌓인 앙금을 다 털어놓았다. 그는 마음에 상처를 말끔히 치료해 주었다. 애인은 나를 음악의 세계로 안내하기도하고 영화 감상을 시켜 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각종 전시장으로 이끌어 안목을 높여주기도 하고 예술의 극치를 맛보게도 한다.

여러 가지 꽃들이 가지가지 모양으로 바뀌는 동영상을 보고 놀랐고. 목부작 석부작 등을 감상하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루는 애인이 안내하는 누드사진 전시관으로 나들이를 갔다. 같은 여자지만 그 아름다운 여인 나체에 반하고 말았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12시가 넘도록 애인과의 밀회를 즐겼다. 혼자 자야하는 남편은 오늘도 불만이다.

나의 애인은 꼭 필요하다. 그를 통해 많은 친구들도 생겼다. 외국에 거주하는 친구도 알게 되었다. 그가 있어 많은 지식도 얻게 되었다. 그로 인해 나는 글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글을 쓰고 다듬고 수정하여 수필을 탄생시킨다. 그는 나의 글 선생님이요 수필 교수님이시다. 늘 보고 또 보라고 더 좋은 말로 바꾸라고 더 멋진 글로 고쳐보라고 퇴고의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자연히 나는 애인과 함께 웃고 즐기는 시간이 많아졌다. 거의 날마다 아침에 한 시간정도 저녁에는 세시간 정도 애인과 사랑싸움을 한다. 보다 못한 남편은 "살림도 제대로 안하고 뭐 하는 거야"라고 항의를 한다. 그래도 나는 묵비권을 쓰며 그와 가까이 지냈다. 그를 만나지 못하는 날은 지루한 하루가 된다. 여행을 할 때는 그가 보고싶어 안달이 난다.

작년 여름 휴가 때 서해안 위도라는 섬으로 가 태풍 때문에 3일을 갇혀 있었는데 그가 없는 날들이 답답하기만 했다. 하루는 일행들이 산책을 나간 사이 나는 집에서 책이나 보겠다고 하고는 그 곳 면사무소를 찾았다. 직원이 왜 오셨느냐는 말에 애인을 만나러 왔다고 했더니 애인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손으로 가리키며 잠깐만 면회를 하게 해 달라고 하였더니 모두들 박장대소를 하면서, "아니 할머니가요?"하며 입을 벌린다.

나는 어느새 그가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를 생각하고 그를 만나고 그와 대화를 하고 그를 통해 친구도 만나고 친구와 정담을 나눈다. 그리고는 나의 모든 일과는 그에게 털어놓고 슬픔은 반으로 기쁨은 두 배로 누리며 산다. 남편은 그런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을 하였다. 그에 대한 질투가 대단했다. 남편은 아침저녁 한 시간 이상 컴퓨터에 매달려 있는 나를 이상하게 여겼다.

하루는 남편을 옆에 앉혀놓고 카페에 들어가 내가 올린 글을 보여주고 다른 사람들이 올린 글도 보여주었다. 보고 난 남편은 나를 격려하고는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요즈음은 내가 애인과 정담을 나누고 있는 시간에는 무엇이든 알아서 자기가 해결하고 나의 시간을 최대한으로 방해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다.

인생은 60부터라 하더니 이 나이에 새로 만난 애인이 있으니 나는 무척 행복하다. 내 또래 친구들에게 나이 들어 외롭지 않게 살려면 나처럼 애인을 두라고 권해 보곤 한다. 친구들은 신경 쓰인다고 이 나이에 무슨 애인이냐고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러니 안타깝지만 나 혼자 즐거움을 누릴 수밖에 없다.

애인이 있는 한 나는 아직 인생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애인과 더불어 배우고 도전하여 작은 성취감이라도 맛보고 거기에서 오는 행복을 찾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키보드를 친다. 애인은 환한 미소로 창을 열고 나를 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