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쓰기는 아주 오래 전, 한글을 읽을 수 있을 무렵부터 나도 모르게 조금씩 싹을 키우고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했을 때 아버지께서 사다주신 빨간 표지의 ‘한국전래동화집’과 어린이 잡지 ‘새벗’을 읽기 시작하면서 글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되었고, 친구들이 부러워 할 만큼 많았던 여러 가지 동화책과 문학전집들은 나의 상상력과 감성을 풍부하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아마 그때 난 이미 알아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네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글쓰기를 통해 얼마나 아름답게 승화시킬 수 있는가를… 어렸을 때부터의 많은 책 읽기는 주위의 하잘것없이 보이는 모든 것들에게 의미 부여를 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것은 자연히 글쓰기로 이어지게 되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가, 어디 주최였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전국 글짓기 대회에서 입상을 해서 상품으로 받은 노란색의 알루미늄 도시락과 주전자가 아침 햇살에 반짝이던 것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우리 집 골목을 지나서 큰길을 건너면 친구네 집이 있었다. 기와에 푸릇푸릇 이끼가 끼고 감나무가 뒤뜰에 그득한 마당 넓은 고옥(古屋)이었는데, 육중한 나무대문을 열고 마당을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양지바른 서재에서 친구의 아버지가 항상 글을 쓰고 계셨다.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이고 수필가이신 친구의 아버지의 모습은 언제나 조용하고 단아(端雅)한 모습이셨다. 철부지 어린 나의 생각에도 그 집의 고풍스런 분위기와 글 쓰시는 친구 아버지의 모습이 매우 어울린다고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친구의 집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대문을 들어서면 친구의 아버지가 글 쓰시는 모습도 보기 좋았지만 온통 책으로 가득 찬 책방에 들어가서 마음대로 책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았던 그 친구집의 책이 부러웠고 친구 아버지의 글 쓰시는 모습이 난 참으로 좋았다.

그리고, 그 집에는 항상 커피 내음이 자욱했다.
입식(立式)으로 개조한 주방에서는 항상 커피가 끓고 있어서 향긋한 커피 내음이 집안에도 마당에도 그득했었는데, 미국에 사는 친구 이모가 보내 왔다는 까만 가루의 커피 맛을 그때 처음 맛봤던 것 같다. 친구의 엄마가 잠시 주방을 비울 때면 살며시 들어가 몰래 마시던 달콤하고 쌉쌀한 커피맛.
문학은 이렇게 커피 맛처럼 달콤하고 또는 쌉쌀하게 나에게 다가왔다. 때로는 힘들게 때로는 아름답게…그러나, 교과서 대신 문학전집만 그득 넣고 다니던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사랑의 열병을 앓던 젊은 시절에도 구태여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마른 나뭇잎 스치는 소리에 가슴 아파 베갯잇을 적시던 가을밤에도, 한줌 볕이 마지막 자락을 감춘 해질녘의 거리를 서성이면서도…하루하루 가족들의 반찬 걱정을 하면서 남편의 발자국 소리에 귀기울이고, 내일은 친구를 만나서 맛있는 점심을 먹을 생각을 하며 잠이 들고… 그러나 내 중년의 화려한 시절은 나의 몸 어딘가에 오래 전부터 똬리를 틀고 있던 문학이라는 병으로 인해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나는 그냥 단순하고 즐겁게 사는 생활인이기를 바랬지만, 나는 글을 쓰게 되었다. 글을 쓰게 된 지 어느새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난 글 쓰기가 힘이 든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좋은 글이 써지리라 기대했지만 그렇지 못해 더욱 부끄럽다. 내가 쓴 글이지만 독자들이 읽게 될 때 이미 그것은 내 것이 아님을 실감한다.

글을 쓰기 위해 많은 생각을 하지만 활자화되는 과정에서 이미 나의 것이 아닌 것으로 와해(瓦解)됨을 어쩔 수가 없다.
아직도 나는 감히 문학을 한다고 말을 할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마약과 같아서, 아니면 커피 맛처럼 달콤 쌉싸름한 그 맛을 잊을 수가 없어 그 언저리에서 기웃거릴 뿐이다.

문학과 현실 사이에서 이즈음 알게 된 것이 있다. 문학보다 현실은 얼마나 치열하고 절절한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여과되는 그 현실은 얼마나 아름답게 우리에게 보여지는가를. 어렸을 때 읽었던, 춥고 배고파서 골목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성냥팔이 소녀의 모습이 왜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오래오래 가슴속에 새겨져 있는지를…이러한 문학의 마력 때문에 난 아직도 글쓰기에 매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쓸 때마다 문득 문득, 어린 시절 커피향 그득한 친구네 집 양지바른 서재에서 글 쓰시던 친구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다.
먼 훗날 나도 그 친구 아버지처럼, 햇살 따사롭게 퍼지는 창가에 앉아서 달콤 쌉싸름한 커피를 마시며 글을 쓰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