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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이 완성되면 지은이 가나다 순서로 정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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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오정자 |
날짜 : 08-03-13 08:33
조회 :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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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길 단상
오정자
해질녘, 부엌 창가에서 바라보이는 나뭇가지에 새들이 날아든다. 오늘따라 새들의 합창소리가 맑고 청아하다. 그 아름다운 노래 소리에 귀 기울이다보면 나도 새처럼 훨훨 날고 싶다. 요즘 들어 부쩍 몸이 찌뿌듯하니 바윗돌을 짊어지고 산을 오르는 것 같이 무겁기만 하다. 본래 약골인데다 운동을 하지 않아서인지 하루가 다르게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건강을 위해 가벼운 차림으로 운동 삼아 산책길에 나선다.
쪽빛 하늘에 떠있는 조각구름과 나무와 꽃을 만나며 일상에서 지친 마음이 수굿해진다.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는 허리를 펴고 양팔을 위아래로 휘저으며 공기를 들이쉴 때 배를 내밀고, 내쉴 때 배를 넣는 복식호흡을 하면서 최대한으로 운동 효과를 높이려 발끝으로 걷는다.
빠른 걸음으로 30분정도 걷고 나면 차디찬 손이 이내 따뜻한 기온이 감도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걸을 때 발바닥에 가해진 압력으로 혈액의 흐름이 빨라져 피가 온 몸으로 잘 돌기 때문 일 것이다. 걷기의 좋은 점은 뼈를 튼튼히 해 골다공증을 예방하고, 체지방 감소로 다이어트 효과를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혈압을 낮추어 혈액순환을 좋게 한다고 한다. 매일 걷지는 못해도 일주일에 서너 번은 걸으리라 마음을 다진다.
우리 집 언덕배기에 피어난 이름모를 소박한 들꽃들의 재잘거림과 한결같이 푸른 꿈을 꾸고 있는 가문비나무의 수런거림을 뒤로하고 산책길을 따라 걷는다. 집에서 큰 길까지는 왕복 1마일(1.6km)의 거리이다.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 약 25분이 소요된다. 그러나 나는 때때로 자연과의 교감에 귀 기울이다 보면 한 시간 남짓 걸리기도 한다.
그날은 바람이 몹시 불면서 하늘에선 간간이 비를 뿌렸다. 바람을 안고 걷자니 감기에 걸릴 것 같아 가던 길을 멈추고 되돌아갈까 망설이다가 그대로 강행했다. 쉽게 포기하면 미로와 같은 인생길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어려움도 헤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 될까봐 작은 일에서부터 나를 단련시키고 싶어서였다.
길모퉁이를 돌아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핀, 마치 동화에서나 나오는 듯한 분홍색 집을 지나면 잎보다 먼저 꽃이 다투어 피어나 분분히 흩날린 하얀 목련 꽃잎에 눈길이 머문다.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는 아름다운 꽃송이의 조락을 보면서 욕망과 집착에 연연하는 인간의 삶을 생각해본다. 걷다가 잠시 멈추어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또 다시 걷고, 고대 그리스 철학자 마냥 심오한 사상이라도 펼치려는 듯 내가 봐도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길섶에 올망졸망 모여 앉아 속살거리는 자잘한 풀꽃들과 하얀 옷을 걸친 자작나무 잎새의 부드러운 손짓에 살포시 미소로 화답하며 계속해서 산책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온다. 깊은 산이 아닌 동네 산책로에서 계곡의 물소리처럼 영혼을 맑게 하는 자연의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무아지경이 된다. 바위틈사이로 피어난 앙증맞은 꽃들과 키 작은 나무는 돌과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 시정을 자아내 내 무딘 감성을 일깨워 주기에 충분했다.
오르막길에서 숨이 차기 시작한다.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아름드리 침엽수림 앞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나무에 기대어 한껏 기를 받는다. 솔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무심코 올려다 본 드높은 하늘은 푸른 바다에 하얀 조각배가 떠다니듯 구름이 두둥실 떠다닌다. 정처 없이 흘러가는 구름은 내게 마음을 비우라 한다. 텅 비어야 무심해질 수 있다고 일러준다. 굽이치는 생의 여울목에서 한 점 구름처럼 욕심 없는 마음으로 살다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에 젖는다. 생각해보면 인간의 삶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바로 욕심과 집착이었음을 깨닫는다.
내가 산책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태한 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아를 발견하고, 사색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은 한정된 공간에서보다 확 트인 자유로운 공간에서 맘껏 날개를 펼 수 있지 않을까. 두통이 심한 날도, 가슴이 답답한 날도, 하늘과 바람과 구름을 벗 삼아 걷노라면 어느새 심신이 홀가분해져 있음을 느낀다.
길 양옆이 단풍나무로 길게 늘어선 숲 속의 오솔길 같은 호젓한 길에 들어서니 아직은 무성한 나뭇잎으로 그늘을 드리우지 못한 연록의 잎새들이 바람에 나풀거리며 지난겨울을 이야기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혹독한 추위를 견디며 새순을 틔운 그 인내가 눈물겹도록 아름답다. 그들에게서 생의 의지와 겸허를 배운다.
이렇게 산과 계곡을 찾아 나서지 않고 동네 산책길의 정경만으로도 자연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음은 창조주께 감사할 일이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위해 방향을 돌렸다. 그때까지 세찬 바람을 안고 걸었는데 방향을 바꾸니 오히려 바람이 비켜가기도 하고, 내 등을 살짝 밀어주기도 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을 가볍게 내딛도록 해주었다.
인간의 삶도 그런 것 같다. 비바람 몰아치는 험한 고갯길에 서 있을지라도 자신의 마음가짐과 생각여하에 따라 삶의 가치와 의미는 현저히 달라질 것이다. 고난을 축복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에겐 희망의 빛이 비춰질 것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에겐 절망이란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이다.
산책길을 걸으며 잠시나마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의 소리가 어우러진 생명 있는 것들과 만나며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순리를 거역하지 않으며 인간에게 무상으로 베풀어주는 자연의 넉넉함과 지혜를 닮고 싶다. 아직도 욕심 많은 내겐 가당찮은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다짐하고 또 다짐하면서 무욕의 삶을 살고 싶다. 그렇게 훌훌 떨쳐버리고 자연과 가까워질 때 건강한 몸과 마음을 지닐 수 있지 않을까. 새삼스럽게 나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말을 자꾸만 되뇌고 있었다.
어머니의 가발
오정자
긴 겨울을 견뎌낸 수목들이 수런거리고 있었다.
‘봄아, 어서 오라! 겨울나무 아래를 거닐면 봄이 급하다.’라고 봄을 노래한 상허 이태준 선생의 ≪무서록≫에 나오는 문구를 주절거리기라도 하듯이.
사월 초순임에도 메마른 대지를 적셔주는 가랑비가 봄을 재촉하고 있을 뿐, 햇살이 닿지 않는 곳엔 군데군데 잔설이 남아 있었다. 백인 일색인 우리 동네는 봄이면 집집마다 정원에 수국, 튤립, 목련, 개나리꽃들이 피어나 꽃동네로 변하곤 한다.
아카시아 꽃향기가 그리워지는 오월에 친정어머니가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셨다. 오래전부터 계획했으나, 지병인 고혈압과 합병증으로 차일피일 미루다 작은 남동생 부부와 동행하셨다. 노던 미시간 주립대학을 졸업하는 큰 남동생의 졸업식이 있어 겸사겸사 딸자식이 고국 땅을 떠난 지 십수 년 만에, 그렇게도 두려워하시던 비행기를 큰 마음먹고 타셨던 것이다. 다행히도 날씨가 좋았던 덕에 생각보다 기체의 요동이 심하지 않아, 편안한 마음으로 비행기를 타고 올 수 있었다고 흡족해 하셨다.
어머니와 작은 남동생 부부는 큰 남동생의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짐을 챙겨 미시간에서 이곳 매사추세츠까지 두 남동생들이 교대로 운전을 하여 내려오시게 되었다. 오는 도중에 뉴욕 주의 버팔로를 들러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셨다고 한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침식작용으로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선으로 양분되는, 나이아가라 강 가운데 위치한 북아메리카 제1의 폭포이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거대한 폭포수가 내뿜는 불가항력적인 물줄기의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고 폭포의 장관을 이구동성으로 얘기했다.
어머니와 동생 가족은 땅거미가 어슴푸레 깔리기 시작할 무렵에 도착하였다. 몇 해 만에 본 어머니의 모습은 여독 때문인지 예전보다 더욱 수척해 보였다. 병색이 짙어 보이는 얼굴과 눈가엔 논바닥처럼 갈라진 굵은 주름이 얽혀 있어 복받쳐 오르는 감정을 추스르느라 한참동안 눈을 맞출 수가 없었다. 그리움으로 보낸 시간만큼, 세월을 닮아간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듯이.
우리 집에 머무르시는 동안, 멀리 여행하지 않고,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뉴욕의 명소들과 내가 살고 있는 피츠필드 시 근교를 구경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피츠필드 시는 인구 5만의 소도시로 산과 호수가 잘 어우러져 있는 아름다운 전원도시이다. 느릿느릿 오는 봄은 형형색색 피어나는 꽃들의 합창으로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고, 녹음이 짙어가는 여름엔 탱글우드(Tanglewood) 야외음악당에서 음악 축제가 열리고 있어, 보스턴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명연주를 감상하며 한여름 밤의 더위를 날려버리기도 한다.
가을엔 설악산의 선홍빛 단풍에 버금가는 뉴잉글랜드의 불타는 단풍절경에 취해 살아, 어느 누구라도 한번쯤은 시인이 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에는 인근 산의 멋진 설경이 주는 감동에 넋을 잃기도 하는데, 아마도 강원도의 어느 한 도시를 연상케 하는 곳이 바로 피츠필드 시가 아닌가 생각된다.
공기 좋은 집 근처를 어머니와 함께 날마다 운동 삼아 산책하는 것도 하루 일과 중의 하나였다. 동네 어귀에서부터 양옆 길가에 늘어선 단풍나무들은 오월이면 풍성한 잎사귀들로 녹음을 만들어 준다. 나무 아래를 거니노라면 숲 속에 온 것처럼 기분이 상쾌했다.
산자락에 걸린 뭉게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산을 빽빽이 채운 나무들이 한 폭의 풍경화로 펼쳐지고 있다. 맑은 하늘 아래 날아다니는 새들도 우리 모녀의 만남을 기뻐하듯 온종일 지저귀고, 재회한 모녀는 이야기꽃을 피우며 동네 산책로를 오롯이 걷고 있었다. 잘 깎인 잔디 사이로 싱그러운 풀냄새가 후각을 자극해 왔다.
얼마만큼 걷고 있을 때, 어머니는 갑자기 머리가 시원해짐을 느끼셨던지 손이 저절로 머리위로 올라갔다. 순간 당황하시며 “야야, 내 가발이 없어졌구나!”
“네? 가발이요?”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봄날이어서 바람이 벗기지는 않았을 테고, 땅에 떨어졌나 싶어 찾아보았으나, 가발은 온데간데없었다.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 오던 길로 되돌아 가보니, 사람 키 정도가 다닐 만큼 낮게 뻗은 가지에 까아만 가발이 달랑 매달려 있었다. 장난기 심한 사내아이처럼 빈 가지가 살짝 벗긴 것이다.
가발을 다시 찾은 기쁨에 우리 모녀는 박장대소를 하며 배를 잡고 웃었다. 웃고 있었지만, 웃음 뒤엔 왠지 모를 서글픔이 세월의 강 위에 일렁이고 있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 꽤 미인이셨다. 전형적인 한국미가 풍기는 갸름한 얼굴에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키가 훤칠하셔서 미인대회에 참가한다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미모를 지니셨다. 모임에 외출이라도 하시는 날엔 한 시간이나 걸려 꼼꼼히 화장을 하시고, 옷 입는 감각도 뛰어나 그리 비싸지 않은 옷으로 최고급의 옷인 양 연출해 내는 패션 감각도 지니고 계셨다.
지금도 곱게 화장을 하고, 가발을 쓰고 외출하시면 당신 나이로 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하지만 골다공증으로 등이 휘고, 비단결 같던 검은 머리가 푸석한 흰머리로, 그나마 얼마 남지 않아 훤한 두상을 가발로 가려야 하는 지금의 어머니 모습은 적잖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그래도 아직까지 목소리만은 세월도 비껴갔는지 젊었을 때의 음성 그대로 꾀꼬리 소리이다.
세월 앞에 인간은 평등한 것 같다. 부자도 권력가도 모두 세월 따라 젊음은 퇴색되고, 석양에 지는 노을빛을 바라보아야 하는 노년으로 채색되어가고 있다.
어머니는 사남매 중 장녀인 나를 애지중지 키우셨다고 한다. 유아기에 홍역을 앓다 생과 사의 기로에서 살아났으니 어찌 부모에게 있어 애틋한 자식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 후, 온실 속의 화초처럼 키우다 보니, 한여름 날 달리는 시내버스의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정면으로 들이마시기만 해도 감기에 걸리곤 했었다.
옛말에 맏딸은 살림 밑천이라 했던가. 아들을 선호하던 우리네 선조들은 첫딸을 낳은 섭섭함을 그렇게 위로했던 것 같다. 늘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든든했던 맏딸이 당신 곁을 떠나던 순간부터 강한 어머니의 감성은 자신을 지탱하지 못하고,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기 시작하셨던 것이다.
딸 떠난 빈자리에 쓸쓸함과 우울함만이 채워져 떠남의 현실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 채, 오랜 시간 그리움의 세월을 사신 것이다. 아마도 그 무렵 혈압이 높아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자식 사랑이 각별한 한국어머니들이 그렇듯이.
먼 이국땅에서 살고 있는 딸을 한시도 잊지 않고, 그리움과 걱정으로 숱한 날들을 보내셨으니 건강한 사람인들 어찌 병이 나지 않겠는가. 어머니는 고혈압이 지병이 되어 합병증과 함께 지금껏 고생하며, 나이보다 빠른 속도로 노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계절 가듯 우리의 삶도 그렇게 변하는가 보다. 연둣빛 새순이 움트는 봄에 태어나, 신록의 청년기와 장년기를 보내고, 노을빛이 물드는 황혼의 노년기에 접어들면, 비우고 떠나야 함을 준비하며 얼어붙은 겨울 강으로 떠나는 게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풀내음 싱그러운 어느 봄날, 빈 가지가 벗긴 어머니의 가발사건은 지금도 뒷이야기로 남아 가끔 떠올리며 웃곤 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나의 가슴엔 지워지지 않는 무늬로 남아있다. 아카시아 꽃향기가 그리워지는 오월이면, 금방이라도 이름을 부르며 내게로 달려올 것만 같은 어머니에게로, 가보고 싶은 향수로 타오르고 있었다.
-제 4회 재외동포문학상(수필부문) 수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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