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이야기 - 만나고 싶었던 나무들
류인혜
우리 집에 없기 때문에 꽃나무 중에서 가장 부러웠던 것이 넝굴 장미였다. 땅에서 바로 올라온 줄기에서 꽃송이가 피어나는 장미도 아름다웠지만 줄기가 한없이 번져나가 대문과 담 위를 뒤덮으며 피어난 장미꽃이 어울린 광경은 환상적이었다. 초여름 어느 날 친구네 집에 가면 그렇게 담으로 기어올라 만개한 장미꽃을 볼 수 있었다. 어찌나 탐스럽게 꽃송이를 피워내는지, 해마다 그 장미를 보려고 5월을 기다렸다. 요즘은 그 꽃이 흔하다. 아파트 담을 감싸고 내린 장미꽃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덩굴장미를 키워보지는 못했다.
덩굴장미에 대한 마음처럼 나무에 대해서도 그런 부러움을 지니고 있었다. 책에서 읽었거나 말로 만 듣던 나무들 중에서 내가 자라난 고장에서는 쉽게 볼 수 없었던 나무가 여러 종류 있었다. 나무를 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마음의 간절한 소망처럼 만나기를 기다렸다.
특히 매화는 선비들의 글에서나 있는, 실존하지 않는 나무로 여겨왔다. 볼 기회가 있었겠지만 매화라고 눈여겨보지 않았기에 무슨 나무인지도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근래 여러 곳에서 매화를 보았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나무의 빈약한 모양새에 실망을 했다. 나무에 피어난 꽃을 보고 '아하 매화꽃이 피었구나'란 인식은 했는데, 별로 감동이 없었기에 스스로 실망이 된 것이다. 아마 매화를 키우면서 서서히 알게 되는 나무의 정취를 모르고, 이른봄에 눈 속에서 피어나는 그 꽃의 그윽한 향기를 맡아보지 못해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대나무였다. 이웃집 담 밑에서 몇 그루쯤 자라나는 것은 쉽게 보았지만 대나무만 무수히 모여 사는 넓은 대나무 밭을 보고 싶었다. 곧게 자라난 대나무 무리를 바라보며, 바람에 스치는 대나무 잎에서 나는 스산함을 생생한 음으로 듣고 싶었던 것이다. 밀양의 아랑에 대한 전설을 듣고 아랑이 목숨을 잃은 대나무 밭의 전경이 무시무시했는데 하필이면 대나무가 배경이 되었을까 생각해보니 절개를 상징하는 나무라서 그랬던 것 같다.
우리가 펜으로 글씨를 쓸 때, 노트를 새로 사면 앞장의 빈곳에 대나무를 그려서 장식했다. 펜촉으로 반달을 그리고 손가락으로 잉크가 마르기 전에 슬쩍 건드리면 잉크 물이 번져 나와 대나무의 매듭을 표현할 수 있고, 잎도 그럴듯하게 만들어졌다. 대나무 그림을 그려서 카드를 만들기도 하고, 편지지의 빈곳에 그려 넣기도 했다.
봄비가 내리면 대나무 밭에서는 죽순이 무더기로 솟아난다고 한다. 그 비쭉 솟아난 죽순을 보았다. 전혀 어린순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무가 제대로 커서 불쑥 나와버리는 모양이었다. 그만큼 대나무의 생성이 왕성하다는 뜻일 것이다. 대나무는 2∼3년이면 성장하기에 베어내어 많은 일용품을 만들어 그 쓰임새로 사람의 생활을 풍성하게 만들고, 생활도구의 격을 높이는데 일조를 한 식물이다.
어느 해, 진주 남강 변의 촉석루에 앉아 건너편 강가에 무리 지어 서있는 대나무를 보았다. 저것이 무슨 풀인가, 나무인가 바라보다가 문득 빗살처럼 가는 줄기를 흔들고 있는 세죽을 기억해내었다. 가는 줄기로 화살을 만든다고 들었기에 저 멀리에서 바람이 흔들리는 대나무의 무리가 그렇게 미미한 모양으로 보였다. 바로 곁에서 보는, 기둥이 굵어서 강하게 여겨지는 대나무보다 그저 멀리 바라보는 대숲이 신선한 느낌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가지가 흔들리는 모양으로 바람이 부는구나, 대숲의 소리가 휘몰아 오는구나, 가슴 저렸다.
만나보고 싶었던 나무들은 나무 자체에 대한 호기심보다 나무에 관한 주변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는 소외감이 싫었던 것 같다. 당연히 알고 있어야 되는 나무를 보지 못했다는 섭섭함과 나무의 특성을 알기 전에 나무에 대한 많은 이야기로 혼동이 된 모양이다.
사람에 관하여도 같은 맥락이다. 늘 가까이 하고 싶던 사람을 느낌으로만 대하다가 실체를 만나면 이방인을 대하듯 어리둥절해지는 것은 지나친 낯섦이다. 그러나 그 낯섦이 도리어 좋은 나무를 만나서 탐색을 하듯 사람을 신중하게 만들어 준다.
2002년 7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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