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인류 최고의 전문가를 꺾는 순간 사람들은 전율을 느꼈다.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을 통한 가장 충격적인 것은 머잖아 인류 혁명이 일어날 것이며 인간의 범주가 새롭게 규정되어야 할 상황이 온다는 점이다. 즉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점점 좁혀지면서 신체는 물론 인지의 영역까지도 인공지능으로 대체가능할 것이라고 한다. 최근 일본에서는 인공지능이 쓴 소설 두 편이 문학상 예심을 통과하기도 했다. 무기력감과 우울함이 겹쳐 ‘인공지능 포비아’ 조짐도 보이지만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방법을 최대한 모색해야 한다. 인간에게는 신체와 인지 능력뿐 아니라 ‘마음’이 있는 것이다.
동양의 고대 요임금에서 그 기원이 찾아진다는 바둑[博弈]이 인공지능에게 접수되던 날, 16세기 한 선비의 일기를 보면서 느꼈던 감정들이 오버랩되었다. 묵재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은 바둑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다. 그에게 바둑은 외롭고 스산했던 70여 평생을 지켜주는 등불이었다. 바둑을 가리키는 한문 용어로는 기(碁), 혁(奕), 혁기(奕棋), 혁기(奕碁), 박혁(博弈), 수담(手談) 등이 있는데, 특히 수담은 ‘말없이 손으로 대화를 한다’는 뜻으로 바둑이 단순히 승부를 겨루는 게임만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시묘살이의 적적함, 바둑으로 달래다
모친상을 당한 이문건은 묘소가 있는 양주 노원(盧原)에서 장조카 이휘(李煇)와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다. 당시 풍습에 대상(大祥)이 끝날 때까지 만 2년여 동안을 묘소 곁에 움집을 짓고 지내는데, 일이 있거나 건강에 문제가 있으면 집을 다녀오곤 했다. 그런데 무덤가 움집에서 지내는 게 생각만큼 외롭거나 괴기스럽지는 않다. 주변에 또 다른 시묘살이 이웃도 있고, 인근 사는 친인척이 수시로 먹을 것을 가져와 격려하고 위로해주기 때문이다. 이문건의 모친 고령신씨는 1535년 1월 5일에 7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즈음 사촌 형수가 세상을 떠나 바로 옆에는 조카들이 시묘살이를 하고 있었다. 이문건은 거의 매일 조카 문응(文應)과 바둑을 둔다.
“홀로 여막을 지켰다. 정유광이 와서 오이를 주고 갔다. 승려 성증이 와서 미투리를 주고 갔다. 문응과 바둑을 두면서 놀았다.” 이 날 이후 이문건은 근 8개월 동안 거의 매일 바둑을 두고 그 대전(對戰) 상황을 일기에 기록했다. “문응과 바둑을 두었는데, 이기지 못했다.”, “문응과 더위를 피해 검산(檢山)의 빈집에 가서 다시 바둑을 두었다.”, “ 문응이 와서 바둑을 두었는데, 종일토록 하고서야 그쳤다.” 등등.
조카 문응과의 바둑은 산소에서 대상을 치르고 신주를 모시고 서울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매일 계속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열흘에 걸쳐 어머니가 남긴 재산을 3남 2녀의 자녀들에게 분배하는데, 이문건이 주도했다. 세상을 뜬 형과 누이를 대신하여 형수와 자형이 참여하여 전답과 노비를 몫에 따라 나누고 문기(文記)에 서명했다. 그리고 탈상 3개월 후 관직에 복귀하는데, 정언(正言)에 제수되어 벼슬살이를 하게 된다. 이즈음 그는 바빴는지 가물에 콩 나듯 가끔 파트너를 바꾸어가며 바둑을 둘 뿐이었다.
바둑 매니아 이문건은 1545년 을사사화에 연좌되어 그해 9월 28일부터 성주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유배지 생활에 대강 적응한 그는 판관에게 바둑판을 만들어달라고 요청하지만 들어주지 않자, 종이에 바둑판을 그려서 혼자서 바둑을 둔다. 그 후 귀양 온 지 몇 달이 지나 성주 목사의 방문으로 그와 바둑을 두는데, 서너 판 바둑 대국에서 상대가 본인보다 우세했다고 기록하였다.
당시의 성주 목사는 남궁숙(南宮淑, 1491∼1553)으로 첫 대국 이후 둘은 수시로 바둑을 두었다. “목사 영공이 나를 초대하여 바둑을 두고 싶다고 해서, 저문 후에 걸어가서 3판을 두었는데 모두 지고 밤이 깊어 돌아왔다.”, “오후에 목사와 남정자에서 바둑을 두었는데, 다섯 점을 먼저 놓고도 내가 패했으니 아둔하다 하겠다.”, “낮에 목사 영공의 초대를 받고 관아로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다가 바둑을 두었다.”, “목사가 말을 보냈기에 타고 목사청으로 들어가 바둑을 두었다.”, “목사 영공이 나를 초청하여 바둑을 두고 싶어 했으나 아프다고 핑계대고 가지 않았는데, 딸의 기일이기 때문이다.”
유배객, 수령과 바둑 즐기며 청탁 해결도
그의 유배 기간에 수많은 수령이 교체되었다. 목사나 판관이 바둑 애호가일 경우, 이문건의 밤과 낮은 그들과의 대국에 쉴 날이 없었다. 또 수령들과 ‘손으로 대화’를 하는 동안 자신에게 들어온 청탁을 해결하기도 하고, 일상에 필요한 물자들을 지원받기도 했다. 그의 일기에 기록된바, 수령과의 대국을 끝낸 후 각종 청탁을 내밀고 승낙을 받는 것이 매우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이문건의 바둑 파트너는 목사와 판관을 비롯해 자신을 방문해 온 인사나 성주 지역의 사족들이 두루 포함되었다. 그는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의 부친 이원수와 초성(草聖) 황기로(黃耆老, 1521~1567)와도 몇 차례 대국한 바 있다. 이들 또한 단순히 바둑만 둔 것이 아니었다. 나중에 황기로는 이원수의 막내 아들 이우(李瑀, 1542~1609)를 사위로 맞이하였다.
지방관으로 내려온 수령들과 대국을 하는 틈틈이 이문건은 자신에게 글을 배우는 손자를 붙잡고 바둑을 두었다. 13살 먹은 형의 손자 천택에게 놀이삼아 바둑을 가르쳤는데, 16세가 되자 그를 앞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천택의 공부가 끝나자마자 붙들고 바둑을 뒀지만 번번이 패했다. 손주는 그곳에서 사귄 벗들과 놀러 나가려 하고 종조부 이문건은 못가게 하는 모습이 일기 속에 자주 보인다. 아마도 바둑 두자고 채근하는 할아버지를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문건은 성주의 유배 생활 22년 동안 목사와 판관을 합쳐 20명이 넘는 수령이 교체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기별이 올 때마다 혹시 해배(解配)의 은전이 내릴까 부풀었다가, 현실로 돌아오곤 했던 이문건. 결국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그런 삶을 덜 외롭게 한 것은 바로 바둑이라는 벗이었다.
출처 - 실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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