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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변영희 |
날짜 : 16-01-29 09:19
조회 : 13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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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올해로 마흔다섯. 설날이 지나 나이 한 살 늘었다. 이 풍진세상을 만난 풍파지민(風波之民)이 무엇을 할까. 답답한 마음 견디다 못해 오늘은 집을 나섰다. 꼬박 나흘을 걸어 이리역에서 서울 가는 기차를 탔다. 서울의 밤하늘을 이고 숙소에 도착한 나는 이튿날 설레는 마음으로 광문회에 갔다. 석농(=유근(柳瑾))의 명성은 오래전부터 익히 들었지만 이 날 처음 인사를 나눴다. 그는 책 교정하는 일로 한창 바쁜 모습이었다. 우리나라 고서가 발간되는 건 대부분 그의 힘이다. 경암(=이관(李觀))과 함께 손암(=오혁(吳爀))의 집에 찾아가 술기운에 힘입어 흉금을 터놓고 정담을 나누었다. 중간에 대종교가 훌륭한지 천도교가 훌륭한지 치열하게 토론하는 손암과 경암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가한 날엔 탑동공원에서 나 홀로 산보하였다. 이 공원은 광무 초기 농상공부 대신 이채연(李采淵)이 건의해서 만들어졌는데 넓지는 않아도 제법 청초하다.
만주족도 동족이고 한족도 우리 민족이다
남대문 역에서 열차를 타고 의주에 도착하였다. 국경을 건너기 전 동산리에 사는 이로수(李魯洙)를 찾아갔다. 그는 갑오 이전 원세개가 조선에 진주했을 때 십수년간 통역을 했다. 중국말도 잘하고 중국 사정도 환히 아는데 쓸쓸하게 노년을 보내고 있어 안타깝다. 그 집 책상에서 본 『강유위전(康有爲傳)』은 정말 해괴한 책이었다. 강유위가 환약을 올려 사술을 써서 광서제의 심지를 빼앗고 악행을 서슴지 않다가 원세개가 강유위 일파를 제거하고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었다. 원세개는 명신이 아니라 간신이거늘 이렇게 시비가 뒤바뀐 책이 있단 말인가!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드디어 안동역에 도착했다. 여관에서 만난 북경 사람 두방역(杜芳域)에게 중국 현지 사정을 물었더니 중국의 화폐가 성(省)마다 서로 통하지 않고 대신 일본과 서양 화폐가 통하여 중국 상인의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요 나라의 치욕이 이보다 더할 수 없다고 통분해 했다. 안동현에 계신 안교리(=안효제(安孝濟)) 어른께 인사드리고 함께 시내에 나왔다. 기차가 통과하고 기선이 통행하는 저 압록강가의 현대를 보라. 20세기 물질의 발달이 참으로 확연하지 않은가. 안동을 떠나 심양에 도착, 서탑 부근에 사는 외형 김창현(金昌鉉)씨 집에 머물렀다. 심양에는 청나라 태조의 궁전도 있었고 청나라 태종의 능침도 있었지만 내가 놀란 것은 성경도독부 도서관이었다. 도서관엔 소장된 책이 기십만 권이나 되고 진열된 신문, 잡지도 무려 수십 종이나 되었다.
심양에 있자니 마음이 착잡하다. 애신각라의 후예들은 260년 동안 땅으로 보나 인구로 보나 공전절후의 제국을 세웠건만 지금은 어디로 갔는가? 또, 삼학사의 외로운 넋을 위로할 길 없는 나 같은 고국유민은 어떤 사람인가? 삼학사 이후 260년 동안 황명을 생각하며 존화양이(尊華攘夷)를 외쳤지만 상투를 틀고 소매 넓은 도포를 입은 우리들만 사람이고 나머지는 금수라는 헛된 자존감은 아니었는가? 명나라는 우리를 원조했고 청나라는 우리를 우대했고 둘 다 우리나라에 은의가 있었거늘, 중화주의의 관점에서 한족을 높이고 만주족을 내치는 것은 무슨 까닭이며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부여족을 높이고 한족을 내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국시는 존화양이도 아니요 연만조한(聯滿阻漢)도 아니요 명청을 막론하고 그 후예는 모두 우리의 동족이라는 생각이리라. 만주족도 우리 민족이고 한족도 우리 민족이다.
중흥의 길을 찾아 공묘(孔廟)로 떠나리라
열차를 타고 산해관을 지나 북경에 도착했다. 북경에는 신문이 많다. 중국 신문이 본디 수십 종에 불과하다가 신해혁명 이후 수백 종으로 급증했다고 하는데 문명열강과 비교하면 아직 미미한 편이다. 북경의 신문 하면 북경일보인데 북경일보 주필 김자순(金子順)과 만나 필담을 나누었다. 그는 우리나라 사람이지만 어려서 이 땅을 떠나 일본 히로시마를 거쳐 북경에 온 지는 십삼 년이라 하였다. 친척도 없고 혈육도 없고 근래에는 신병으로 주필을 사임했다고 한다. 이 곳 북경에 사는 우리나라 사람이 수삼백 명은 될 텐데 궁핍하기 그지 없다. 양복 아니면 한복(漢服)을 입고 있어서 스쳐 지나가도 서로 동포인 줄 모른다.
중국 사정도 암울하기만 하다. 공도회관에서 만난 중국 지식인들은 중국은 희망이 없고 곧 우리나라 전철을 밟을 거라고 비관하였다. 아, 앞으로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까? 그리고 중국은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와 동문(同文) 동교(同敎)의 중국이 일어나야 우리나라도 희망이 있는 법. 나는 중흥의 길을 찾아 공묘(孔廟)로 떠나리라. 시대의 유학을 다짐하리라. 곡부를 지나 항주, 홍콩까지 미친 내 발걸음이 궁금한 독자는 나(=이병헌(李炳憲 1870~1940))의 여행기 『중화유기(中華遊記)』를 보라. 중화민국을 간다는 것, 명나라도 아니고 청나라도 아니고 중화민국을 간다는 것, 그 역사의 무게를 기억해 달라.
출처 - 실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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