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집 서울] 소식지 42호 2005년 4월
문학인이 띄우는 편지 -4
돈보천리(豚步千里)
- 김삼주 시인께
김용성
원래 편지쓰기를 싫어하는 성미라서 당황스러웠소. 하지만 편지를 받고 답장을 보내지 않는 것도 결례인 것 같아 조금은 긴장을 하면서 필을 들었소. 한데 어떻게 불러야 옳을지 잠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소.
김 교수라 부를까. 평소 교수사회에서도 직함을 부르는 것을 꺼리는 터라 김 교수라 부르는 것은 삼가기로 했소. 그렇다고 용龍해 띠 동갑을 빙자하여 김군이라 부르는 것도 시건방진 것 같아 피하기로 했소. 고심하던 끝에 돌아가신 황순원 선생님께서 생전에 나를 부르실 때 김 작가라 하셨던 것이 떠올라서 쾌재를 부르며 김 시인이라 부르기로 했소.
김삼주 시인. 우리가 처음 만난 것도 근 20년이 가까워오고 있구려. 나는 처음부터 김 시인에게 형제애 같은 정을 느꼈는데 그것은 김 시인이 지닌 온후하고 신중한 성격과 선후배 사이에서 풍기는 강한 친화력 때문만이 아니라 어려서 겪은 가난의 고통과 외로움이 몹시 닮아 있다는데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는 있소.
천인일성千忍一聲, 김 시인이 편운片雲 선생님의 말씀을 인용하셨으니, 차운次韻은 아니지만, 나 또한 인용하는 것을 양해하기 바라오. 편운 선생님께서 내게 ‘천인일성’이란 휘호를 써주시기 휠씬 전에 휘호는 아니지만 말씀으로 ‘돈보천리豚步千里’를 들려주시지 않았나 싶소.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20년 전 선생님께서 나를 인하대에 대우전임강사로 추천해주시면서 “용성아, 대번에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접어두고 한 이삼 년 때를 기다리거라. 그러면 좋은 일이 생길 게다” 하신 말씀이 돈보천리가 아닌가 하오.
그 후 내가 돈보천리를 망각하고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있으면 함부로 말을 지껄이던 그 시점에서 선생님께서는 내게 천인일성을 써주심으로써 힐책성의 경고를 내리신 것이고 김 시인에게는 돈보천리를 써주심으로써 미래에의 희망을 심어주신 것이 아닌가 싶소.
더듬어 보면 나의 무인일성의 버릇은 꽤 오래된 것 같소. 해서 자성하는 마음에서 학교에 강의 나온 이 박사에게 주안 삼거리 근처에서 술 마시던 시절, 내가 왜 일성을 내질렀는지 물었더니 나의 일성 아니 일갈을 너무 많이 들어서 기억에 없다는 대답이었소. 허허.
김 시인은 천품이 신중한 사람이니 천인일성이란 말을 들을 수 없겠으나 교수로 입지를 굳힌 지도 10년여, 중견시인으로 활약하는 요즘에도 여전히 돈보천리의 인생관을 버리지 않은 것 같아 내게는 가끔 안쓰럽게 느껴질 때도 있기는 하지만, 후생가외後生可畏, 김 시인의 웅숭깊고도 꿋꿋한 지조 같은 것마저 감득하게 되면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는 것이오.
외곽外廓에서 외곽으로 길을 간다 / 십여 년의 나날을 /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눈이 쌓이는 / 외곽의 길을 간다 / 중심을 사수死守하는 / 보이지 않는 성벽을 따라 도는 / 쳇바퀴 같은 길 / 중심으로 가는 밀물 같은 행렬을 벗어나 / 산자락 갈피, 갈피, 돌아가는 길
지난 해 7월초, 나의 ≪기억의 가면≫을 밤새워 읽었다는 글과 함께 보내준 김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 ≪바람 그리고 외곽순환도로≫의 서시 ≪외곽의 바람으로≫의 1연과 2연을 인용해 보았소. 이 시집에서 나는 인천 자택과 경원전문대학을 10여 년 동안 오가며 터득한 김 시인의 ‘중심과 외곽’의 사상을 배우오.
많은 사람들이 권력과 명예와 지위와 돈을 좇아 서울로 돌진하는 풍속도를 보면서도 거기에 현혹되지 않고 외곽 어디쯤에 ‘나만의 영혼의 집’을 세울 수 있는 구심점을 찾으려는 고독하지만 건전한 사상을 말이오.
김 시인의 회의처럼 인간들이 물욕에만 사로잡혀 뒤죽박죽 얽힌 채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곳은 인간 영혼의 중심이 될 수는 없는 것이오. ‘돈보천리’, 나는 언젠가 김 시인의 사상이 시를 통해 그윽한 꽃을 피울 날이 오리라 굳게 믿소.
모쪼록 우리의 정의情誼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며 무엇보다도 부인의 병환이 쾌차하기를 기원하오. 참, 잊을 뻔했소. 말이 나온 김이니 이른 봄이 가기 전에 이 박사와 함께 사당동 과메기 집에서 한 번 만납시다.
(소설가·인하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