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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집 서울] 소식지 41호 2005년 3월

문학인이 띄우는 편지 -3

천인일성(千忍一聲)

- 김용성 선생님께

김삼주

선생님의 소설 ≪기억의 가면≫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지난해 유월, 선물로 받은 다음날, 학생들을 따라간 서해의 외딴 섬 민박집에서 밤을 새워 읽었던 이 소설을 지금 다시 펴 읽고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말미에서 시작하여 육이오 한국 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쟁의 한 세기를 지나오는 동안 ‘억울한 희생자들’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슬픔을 역사의 구석구석을 뒤져 생생하게 그려낸 이 소설을 읽노라면 선생님께서 ≪이민≫을 탈고한 이후 몇 년을 왜 그리 침묵하셨던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읽는 지금도 작중 인물 이진성과 선생님이 자꾸 겹쳐지곤 합니다. 물론 도입부만 읽어도 이진성의 출생에서 선생님의 자전적 이야기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지만 그래도 이따금씩 겹쳐져 옴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 까닭은 아마도 “나를 억압했던 기억들을 되살리고, 영혼의 비명이라 할 수 있는 많은 기록들을 인용하고, 작중 인물의 허구적 수기 또는 회고담을 소설화하거나 죽은 자가 말을 하는 이상한 소설을 끼워넣기도 하면서” 이 소설을 쓰셨다는 후기의 말씀처럼 이 소설을 이룬 독특한 형식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억압한 기억”을 선생님은 베르그송의 순수기억이라는 용어를 빌어 설명하셨지요. 역사란 의식적인 기억이 기술자의 합리화를 거쳐 기록된 것, 순수기억이란 그 역사의 이면에서 “고유한 초점을 갖고서 삶의 모든 사실을 어떠한 세목도 빠뜨리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하고 있다가 터뜨리는 영혼의 비명”이라구요.

제 순수기억 속에서 선생님은 무시로 ‘영혼의 비명’으로 돋아나와 제 머리 속을 메우곤 하는데요, 그 하나, 편운片雲 선생님의 기일을 앞두고 돋는 생각, 을해년이었던가요, 벌써 십 년이 지나가 버렸습니다만, 정초에 혜화동 편운 선생님 작업실에서 새해 인사를 드릴 때 편운 선생님께서 주신 휘호 천인일성千忍一聲이 생각납니다. 제게는 돈보천리豚步千里를 주셨구요. ‘돈보천리’를 주신 까닭이야 제가 전임교원 문제로 마음을 졸이던 때이니까 순리에 좇아 천천히 살라는 뜻이셨겠지만 선생님께 주신 ‘천인일성’이란 말씀은 퍽 의아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선생님은 평소에 말씀이 없는 편이시고 어쩌다 단둘이 앉는 술자리에서도 그간의 안부를 묻고 나면 거의 침묵하셔서 오히려 말주변도 없는 제가 그 침묵을 깨려고 떠듬거리며 애쓰곤 했으니까요.그래서 그다음에 편운 선생님께 여쭈었지요, 왜 그 휘호를 주셨냐구요. “용성이는 무서워, 비위에 거슬리면 참지를 않거든.” 그리고는 껄껄 웃으셨습니다.

편운 선생님께서도 무서운 제자가 있었구나, 나에겐 친형님 같은 따뜻한 분인데, 아, 그게 그런지도 몰라, 언젠가 두어 번 술자리에서 본 그 매서운 가르침, 그것이 대인관계에선 ‘무서움’으로 나타나는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잇달아 주안 중앙극장 맞은편에 있었던 족발집 사건(?)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선생님과의 첫 술자리, 연안부두 어구상 공구상들 뒤편에 붙은 간판도 없는 선술집, 모양도 내지 않고 수북이 썰어주는 병어나 준치를 생된장에 찍어 씹으면 소주의 쓴맛이 고소한 감칠맛으로 바뀌던 그 자리에서 몇 년 지나지 않은 때라 매우 조심스러웠는데요, 그날 저는 선생님의 일성一聲을 처음 들었었지요. 지금은 중년으로 접어든 이 박사가 혼쭐이 나는 장면이었지요. 술도 몇 순배 돌고 족발도 굵은 뼈다귀만 남고, 분위기가 따뜻해지고 있는데 이 박사가 불쑥 실언을 했고 제 마음에도 그 말이 걸리고 있는 순간 선생님의 굳은 음성이 터져 나왔지요. 술이 확 깰 정도로 매서운 음성, 나중에 이차로 생맥주를 마시면서 마음을 조금 푸시긴 하셨지만 그때의 그 음성, 그 눈빛이 아직도 제 기억 속엔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그 후로도 우리는 선생님을 모시고 술자리를 갖는 것이 좋아 밴댕이집이며 감자탕집 갈매기살집 그리고 소래 포구의 녹슨 철길 옆에서, 가평의 강가에서, 동해 바닷가에서 술을 마시며 사회 현실을 되짚으며, 그러다가 또 누군가가 실언을 해서 선생님의 매운 질책을 받으며, 참 아름다운 기억들을 쌓아왔습니다.

‘천인일성’, 편운 선생님의 말씀은 어른들끼리 만나실 때나 가져가시고 저희들에게 오실 때는 천성千聲으로 오십시오. 선생님의 그 매운 말씀이 우리를 우정으로 뭉치게 하고, 우리의 내면을 가꾸게 하는 영약이니까요. 선생님, 말씀드리는 김에 다음 자리를 정할까요. 저번에 가셨던 과메기집, 어떠시온지요.

(시인·경원전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