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수(金萬洙)와의 만남

염상섭

보통 폐허시대라고 부르지마는 ‘시대'라고 하기는 좀 과중한 느낌이 있어 그 창간 전후의 시대상을 회고하여 볼까한다. 그렇다 하여 <폐허>나 폐허동인을 중심으로 한 문학운동이 차지하는 우리의 근대 문학사상 의의를 과소 평가하는 뜻은 아닐 것이다.

소위 '폐허시대'라는 것은 3.1운동 익년(1920)으로부터 수년간을 지칭하는 것인데, 우선 3.1운동 직후의 정세와 민족해방이 실현된 8.15 당시와를 비교하여 보면 그 울연한 신흥기분에 있어서는 유사한 점이 있으되 전자는 외세에 대한 경제투쟁이었고 후자는 외세를 빌은 정치투쟁이었던 데에 시대상이 현수(懸殊 )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때(1920년 1월) 나는 도쿄에서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와달라는 초전을 받고 동지 창간에 필요한 활동과 기사 수집을 끝 마치고 귀국하였는데, 기자생활이 민족운동에 의의 깊은 봉사라는 것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나 당면문제로는 기자라는 직업에 생계를 맡겨 놓고 개인적 사업, 또는 정신적 내부생활로는 문예에 정진하고 문학운동을 전개하려는 결심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삼십 사오 년 전일이라 문우들과의 교우, 특히 <廢墟> 동인들과 어디서 어떻게 만났던 기억이 알삽하거니와 동인의 한 사람이던 지금은 기 작고인이지마는 군을 만난 것은 귀국한 지 얼마 안되어 종교 예배당에 무슨 강연회던가 있던 날 밤이었다. 누구의 소개이었던지? 또 그 후 어떠한 경로를 밟아 몇 번이나 회합이 있은 후 동인 조직이 결성되었던지 그 역시 기억에 남지 않았거니와 어쨌든 이해 봄에 동아일보 창간 후 적선동 김군 집에 문패를 붙이고 매일 같이 모이게 되었다. 동인 중 생존한 사람으로는 공초 오상순군, 수주 변영로군, 안서 김억군, 상아탑 황석우군과 필자들이요, 문단을 떠난 사람으로 문박 이병도군이 일시 참가하였었고 고인 된 사람으로 남궁벽군, 김만수군 등 외에 화가 김찬영군, 여류시인 김명순군의 소식은 묘연하다.

이 중에 사학가 이군과 연구하던 김만수군과 나를 빼놓고는 거의 전부가 시인들이었고 창작방면은 일반적으로 아직 숙조(肅條)하였다.

이해 초하에 내놓은 <廢墟> 창간호에는 창작이 없이 시, 수필을 중심으로 하고 나는 권두언을 썼었다. 창간호 천부를 찍어서 매진은 되었으나 채산을 무시한 문청들의 노름이라 수지가 맞을 리 없었다. 모라는 지금은 없어진 서사의 원조로 출발하였던 것인데 3호를 내놓을 길이 당장에 막혀 버렸다. 이때부터 폐허사 문폐를 붙인 적선동 회합장소는 한 문학 동호자들의 사랑이요 합숙소쯤 되었다.

김군은 단 모자 두 분이 사는 중요한(조용한?) 집이라 여름이면 대청에 모여 앉아 고담준론으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밤낮 가리지 않고 드나들며 술집 기생집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이때 풍속에 여성과의 접촉이란 기생뿐이요 기생집 순례가 청장년간에 소견(銷遣)거리요 상식화 하니 만치 예사이었었다.

이 풍속은 오랜 봉건적 유습으로서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뜻뜻한 일이지마는, 망과 광명과 갈 길을 잃고 몰락하는 생활에 헤메는 망국민으로서 유일한 위안이랄까 자기 기만의 찰라주의적 퇴패적 풍조가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도 하겠지만는 또 하나의 근인은 3.1운동 이후 경제산업의 부흥열에 띄워서 남은 땅마지기라도 팔아 올려다가는 회사를 조직하네 어쩌네하는 동안에 실속없은 헛 경기를 조장하여 기생집 출입이 청년들의 다반사가 되었던 것이라고도 하겠다.

이러한 것이 후일에 폐허사 혹은 폐허시대를 세기말적 퇘폐 경향을 대표하는 듯이 지목되는 모양이나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개중에는 의복이라든지 언동이 현기(衒奇)에 흘러 좁은 사회의 이목을 끌게되고, 문학적으로도 이미 2·30년 뒤진 프랑스의 이러한 문예사조가 제1차대전 후로 3·1운동이란 쓰린 경난(經難) 후의 실정에 부합되는 바 있고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바 있어 이것이 동인의 손으로 소개된 것이 그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보겠거니와, 그 보다도 근본적 문제는 당시의 시대상이 사연(使然)케 한 것이라면 구차스러운 변명이라 하겠는가?

이 시기의 진정한 문학적 경향으로 말하면 '휴매니즘'과 '니힐리즘'의 교차점 위에 자연주의가 등장하였다 함이 타당치나 않을까 생각한다. 이것은 <폐허> 동인들을 이렇게 구분하여 볼 수 도 있는 것이지마는 신흥문단 전체의 동향이기도 하였다. 여하간 이와 같이 폐허시대란 것이 있다하면 그리고 이 시대의 공적이 있었다 하면 시문학이나 창작에 있어서나 본격적 순수문학을 수립하면서 그 보급에 노력하는 일방 인도주의적 허무주의적인 양 경향을 좌우의 암벽으로 삼으면서 자연주의 문학을 수립한 데에 중점이 놓여 있었다 할 것이다.

이 지간에 <폐허>는 2호로 끝 마치고 창간된 해 12월이든가 <폐허이후>로 개제하여 제3호 대신 내놓고 절간이 되었거니와 <폐허이후>라는 제호가 우연히도 '바톤'을 그 다음에 오는 '백조파'에게 전한다는 의미도 되어 흥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신천지, 1954년 2월호에서)

염상섭(1897-1963)은 소설가다. 신문학초창기의 <폐허> 동인들의 한 사람이었다.

[부싯돌] 2000년 가을 1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