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
 |
|
|
| 오늘 방문자수 |
   |
| 어제 방문자수 |
   |
| 최고 방문자수 |
 |
| 방문자수 누계 |
 
|
|
|
|
|
|
|
|
|
|
|
|
|
|
| 글쓴이 : 변영희 |
날짜 : 16-05-28 09:27
조회 : 1398
|
|
|
|
1942년, 당시 9살 무렵이었던 한 아이의 기억 속에 그 해는 하얗고 말랑말랑한 촉감의 고무공과 함께한다. 시집올 때 혼수로 가져온 놋주발을 공출로 내어놓아야 하는 어머니의 한숨은 나 몰라라 하고, 아이는 학교에서 나누어 준 ‘싱가포우르 함락 기념’이라는 스탬프가 찍힌 고무공을 받고는 ‘히(ひ)-후(ふ)-미(み)-요(よ)’ 즉 ‘하나-둘-셋-넷’을 헤아리며 마루에서 공치기 놀이에 빠져들었다. 조선말을 쓰는 친구를 발견하면 후다(딱지)를 뺏어 학교에 가져가 상을 받고 좋아라 하던 일상에 즐거운 놀이가 하나 더 보태진 것이다. 대동아공영이라는 깃발 아래 일본이 1942년 2월 15일 고무가 생산되는 나라 싱가포르를 함락시킨 사건과 오버랩되어 있는 이어령의 유년기 기억의 한 단편이다(이어령,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같은 시대, 다른 삶
이 식민지 아이의 손에 고무공이 쥐어지는 계기를 이룬 사건이 일어났던 그 2월 15일 바로 다음 날, ‘모가지가 길어 슬픈 짐승’을 노래했던 시인 노천명은 나중에 자신의 시작(詩作) 연보에서 평생 지우고 싶었을 시 하나를 쓴다. 〈싱가폴 함락〉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그녀는 이 시에서 “아세아의 세기적인 여명은 왔다 / 영·미의 독아(毒牙)에서 / 일본군은 마침내 싱가폴을 빼앗아내고야 말았다”고 감격하면서, “대동아의 공영권이 건설되는 이 날 / 남양의 구석구석에서 앵글로색슨을 내모는 이 아침”을 찬양하고 “종려나무 그늘 아래 횃불을 질러라 / 낙타 등에 바리바리 술을 실어 오라 / 우리 이날을 유쾌히 기념하자”며 헹가래를 쳤다. 2월 16일 밤에 쓰고 2월 19일자 〈매일신보〉에 실었으니, 일본이 싱가포르를 함락한 지 하루 만에 쓴 따끈따끈한 시였던 셈이다.
이에 화답하듯 노천명, 최정희와 함께 당대 ‘모던 걸 3인방’으로 불렸던 모윤숙 역시 이틀 뒤인 2월 21일 같은 신문에 〈호산나 소남도〉를 기고한다. “2월 15일 밤! / 대아시아의 거화! / 대화혼의 칼을 번득이자 / 사슬은 끊이고 / 네 몸은 / 한 번에 풀려 나왔다 / 처녀야! 소남도(昭南島)의 처녀야!” 라고 시작하는 시이다. ‘호산나(Hosanna)’는 승리의 기쁨을 종교적으로 표현하는 히브리어이고 ‘소남도’는 싱가포르를 가리키던 당시의 별칭이라 하니, 제목을 풀이하면 ‘구원하셨네, 싱가포르를!’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3인방답게 나머지 한 사람 최정희 또한 이런 흐름에 기꺼이 가세하여, 황국의 신민으로서 조선의 어머니들은 아들을 자랑스럽게 전쟁터로 보내야 한다며 소설과 대중강연 등을 통해 독려하고 다녔다.
같은 해, 경술국치 직후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독립운동을 하러 떠났던 석주 이상룡의 아들 이준형(李濬衡: 1875~1942)은 노모를 모시고 고향 안동에 돌아와 살고 있었다. 나라를 되찾을 때까지 자신의 시신을 조국으로 가져가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국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째 되는 해였다. 그에게도 일본이 싱가포르를 함락시켰다는 소식은 들렸을 것이다. 이준형에게 싱가포르 함락은 말 그대로 욱일승천으로 뻗어 나가는 일본의 기세가 역사의 한때 에피소드가 아니라 세계사적인 대세임을 증명해주는 사건으로 받아들여진 듯하다(며느리 허은 여사가 자서전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에서 한 회고). 하여 그는 자신의 예순일곱 번째 생일인 9월 2일 일제 치하에서 “하루를 더 사는 것은 하루의 치욕을 더하게 될 뿐이다”는 유서를 아들에게 남기고 목의 동맥을 끊어 자결한다. 자신은 평생 수치스런 일이 많았으니 관을 덮는 명정(銘旌)에 ‘치재(恥齋)’라고 써달라는 말을 함께 남기고.
때론 시대 밖에서
우리가 올바른 삶에 대한 희망을 접지 않는 한, 모던 걸 3인의 삶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하고 이준형의 삶은 기려져야 온당하다. 그런데 궁금한 생각이 하나 든다. 이들이 같은 시대를 살면서 다른 선택을 한 바탕은 무엇이었을까? 언필칭 투철한 민족의식의 농도일까, 아니면 어떠한 고난도 기꺼이 감내해내는 굳은 심지의 개인차였을까, 그도 아니면 올곧은 삶에 대한 성찰의 유무였을까? 만약 일제 강점기가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면, 고무공을 받아들고 들떠 ‘히-후-미-요’를 세며 공을 치고 같은 조선인 친구의 후다를 뺏아 으쓱해 하던 식민지 아이들의 삶은 지금 어떤 모습일까? 그들은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평생을 살다 이제 생의 마감을 준비하는 나이들일 터인데…
〈오장 마쓰이 송가〉(1944)를 비롯하여 적지 않은 친일시를 남김으로써 그를 기리는 독자들의 가슴 한쪽에 늘 아쉬움의 생채기를 남긴 미당 서정주는 생전의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친일에 대하여 그때는 일본이 그렇듯 쉽게 무너질지 몰랐다는, 지극인 소시민적인 소회를 피력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면 이런 물음도 가능할 듯하다. 거칠 것이 없어 보이는 일본도 3년만 있으면 망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면 이준형이 자결했을까? 하지만 그에게도 미당에게도 모던 걸 3인방에게도 그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중일전쟁(1937), 조선어 사용금지(1938), 창씨개명(1940), 태평양전쟁(1941) 등을 밀어붙이며 그야말로 파죽(破竹) 기세 한가운데 있던 당시의 일본을 보면서 곧 망할 거라고 판단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살아가면서 때때로 자신의 시대 밖으로 나가보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다. 숲이 아니라 나무만 보고 가다간 길을 잃는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시대를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부터 이미 다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과 얽혀 있는 착종적 사건이다. 그러므로 나름 자신의 시대를 충실히 살아가고 있다고 자부하더라도, 이따금 허리를 펴고 반상 전체를 살피는 바둑기사처럼 시대 밖으로 걸어 나와 볼 일이다. 확신에 차 걸어가는 자신의 발길이 실은 나무만 보고 가는 건 아닌지 살피기 위해서이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출간된 지도 반세기를 훌쩍 넘긴 이때 우리 사회에 여전히 자신의 이념적 신념에 매몰되어 노래 하나를 두고도 협량한 마음을 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어 하는 말이다.
출처- 실학산책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