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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의 서울집과 조선의 ‘폼페이’유적 / 배 우 성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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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변영희 |
날짜 : 16-01-29 14:08
조회 : 15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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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2년 늦여름, 박지원의 일상생활
밥을 해 주던 여종은 도망가 버리고 삼시세끼를 행랑 댁 식구들에게 의존해야 했으니, 박지원의 처지가 처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마냥 나쁜 것만도 아니었다. 절대적인 자유 시간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부쳐온 편지를 보고도 ‘평안하다’는 글자만 훑어볼 뿐 그뿐이었다. 경조사에도 발길을 끊었다. 여러 날 동안 세수를 하지 않거나 망건을 쓰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자다가 깨어 책을 보고 책을 보다가 또 자도 깨워주는 이가 없으므로, 혹은 종일토록 실컷 자기도 하고, 때로는 글을 짓기도 했다. 친구가 술이라도 보내주는 날이면 흔쾌히 술을 즐기기도 했다.
모든 것이 지루해질 때면 철현금(鐵絃琴)이라는 서양악기를 두어 가락 타기도 하였다. 그해 음력 6월 18일, 박지원은 홍대용의 집에 들렀다가 이 악기를 처음 보고 흥미를 느꼈다. 악기의 연주법을 하나하나 익혀가다 보면 지루함과 무료함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는 딱히 해야 할 일이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놓았지만, 그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노하우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36세에 불과한 박지원이었지만 그의 머리에는 벌써 흰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즈음의 그에게는 젊은 시절의 사회비판의식도, 과거 시험에 대한 열정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병들고 지친 데다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더 이상 선비이기를 포기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는 집 앞을 지나가는 땔나무 장수나 참외 장수를 불러 세우고는, 그들에게 ‘효제충신(孝悌忠信)과 예의염치(禮義廉恥)’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밥투정하는 딸아이에게 거친 말을 퍼부어대는 행랑아범을 불러 세운 것도 ‘평소에 가르치지 않고 꾸짖기만 하면, 커갈수록 부모 자식 간의 은의(恩義)를 상하게 된다”는 점을 깨우쳐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기가 선 자리에서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박지원이 살던 전의감동 골목 집의 풍경
그해 음력 6월 어느 날 밤, 엷게 낀 구름 사이로 하현달이 수줍게 얼굴을 내밀었다. 하현달은 그때나 지금이나 음력 22~23일경에 뜬다. 말하자면 박지원이 홍대용을 찾아가 철현금을 구경한 지 4~5일쯤 지난 어느 날의 밤 풍경인 것이다. 한 젊은이가 길을 나섰다. 몇 년 만에 ‘그분’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마침 통행 금지를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집에 계시려나?” 젊은이는 어느 집 문 앞에 멈춰 서서 등불이 집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는 대문에 들어섰다. 그곳에 ‘그분’이 계셨다. ‘그분’의 이름은 박지원, ‘그분’을 찾아온 젊은이는 19세의 이서구였다. 그런데 이서구가 박지원을 찾아간 곳은 도대체 어디였을까?
이즈음 박지원은 처자식을 모두 처가로 보낸 뒤, 서울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황해도 금천의 ‘연암’골을 발견하고는 그곳에 숨어 살겠노라 생각하던 그였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서울집이 필요했다. 물론 백탑파로 불리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뿐 만은 아니었다. 몸집이 비대하고 성격이 예민한 박지원에게 여름은 특별히 힘들고 괴로운 계절이었다. 더위도 더위지만 들끓는 파리와 모기, 잠을 방해하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더 큰 문제였다. 박지원이 서울집에서 여름을 나려 했던 것은 그런 ‘불편함’을 조금이라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지원 자신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이즈음 ‘전의(典醫) 호동(衚衕)’에 살고 있었다 한다. ‘전의’는 전의 감동을, ‘호동’은 중국의 좁은 뒷골목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의 집은 전의감동이라 불리는 동네의 좁은 뒷골목 안에 있었던 것이다. 이서구가 찾아온 곳이 바로 이 집이다. 전의감동은 오늘날 서울 도심 공평동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런데 지금 이곳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전의감동 골목길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지난 2014년 여름, 도시환경정비사업의 일환으로 ‘공평동 1,2,4 구역’에 대한 매장문화재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약 8개월간에 걸친 발굴 결과, 조선 시대의 골목길과 집터 유적이 온전히 드러났다. 서울시는 문화재청 및 사업시행자와의 협의를 거쳐 신축 건물 지하 1층에 유구(遺構)를 전면보존하고 유구 전시관을 조성해 시민들에게 공개하기로 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전시관은 ‘민관협력 방식’으로 진행되는 최초의 정비사업 모델이 될 것이라 한다. 그간 도심재개발사업 과정에서 일부 매장 문화재들이 불가피하게 훼손되기까지 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반가운 소식이다. 이제 역사유산을 전면 보존하기로 했으니 다음 과제가 남았다. 도대체 무엇을 기억하고 왜 기억해야 하는가? ‘조선의 폼페이 유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시급한 것은 아니다. 그곳의 의미를 어떻게 ‘구성’해낼 것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근 청진동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곳에 가면 야외에 전시된 시전행랑과 우물을 볼 수 있다. 건물 벽면에는 한옥 배치 모형이 전시되어 있는가 하면, 조선 시대 통사를 보여주는 영상물도 상영되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문화재가 가진 ‘관계성’을 존중하려면 매장문화재를 도시조직과의 연관 속에서 정의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핵심적인 일부 유구만을 이전 복원하는 방식으로는 그 맥락을 살릴 수 없다. 발굴된 유물이 미시적인 것이라면 우리의 역사 이야기도 기본적으로는 거기에 어울릴만한 ‘누구’의 역사, ‘어느 골목길’의 역사가 되어야 하겠지만, 거시적인 통사만으로는 그런 요구를 감당할 수 없다.
바라건대 청진동에서 할 수 없었던 것들을 공평동 유구전시관에서 성취할 수 있었으면 한다. 아마도 가장 어려운 일중 하나는 ‘누구’의 역사, ‘어느 골목길’의 역사를 찾아나가는 일일 것이다. 공평동 1,2,4 지구는 도심재개발사업에 따라 임의적으로 지정된 구역이고, 역사적으로 중요했던 장소는 그 ‘구역’의 경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구역’에 부합하는 역사적 사실을 드러내기에는 자료가 턱없이 부족하다. 더구나 그렇게 발굴한 미시적인 사실들을 전체사의 일부로 자리매김하는 일은 더욱 쉽지 않다. 그밖에도 수많은 어려움들이 있다. 그러나 박지원의 사례는 1772년의 전의감동에서 2016년의 공평동을 잇는 그런 작업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다른 ‘업역(業域)’에 대한 위화감을 이유로 그런 통합적 연구의 필요성 자체까지 의심해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전문가의 ‘논문’을 극소수의 동업자들만이 읽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네이버’가 가르쳐주는 사실들을 넘어 대중들과 호흡하려 한다면 더더욱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일이다. 더 많은 사회적 맥락들과 더 구체적인 ‘누구’의 이야기들을 통해 공평동 유구전시관에 인문학적인 향기가 넘쳐나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 출처 -실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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