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아

도서관 봉사를 통해 알게 된 분들을 만났다. 한 다리 건너면 다 알게되는 좁은 이 타운에선, 모이고 나니 대학 선배이기도 하고 문단 선배의 친구의 친구이기도 해서 금방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래서 밥만 먹고 헤어지려던 것이 스킨 케어 까지 발전이 되었다. 한 분은 밥을 사 주시고 한 분은 피부 마사지까지 책임을 지신 다며 막내 격인 나는 그저 따라만 오면 된단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남편에게 거짓말 보태어 양해를 얻어 점심 먹으러 나선길이 저녁까지 연장이 되었다.

생전 받아 본 일이 없는 피부관리. 그러니 첨 가보는 장소였다. 가운으로 갈아입고 다섯 명이 단체로 누웠다. 얼굴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반신을 거의 다, 그리고 팔과 손까지 마사지를 받는데 여왕 팔자가 따로 없었다. 얼굴엔 스팀을 쏘이고 가지가지 팩을 하고, 손에는 뜨거운 파라핀을 입혀 장갑처럼 씌웠다. 주인 잘못 만나 크림도 제대로 안 바르던 피부가 많이 놀랬을 것이다. 그런데 가만 누워있다 보니 처음 30분 정도는 신기한 체험에 지루한 줄 몰랐는데 갈수록 뒤틀리는 것이었다. 눈을 가리고 얼굴에 팩을 했으니 책도 못보고, 입 주변에 주름 생긴다고 말도 못하게 하고, 두 시간 정도 계속된다며 편히 잠을 자라고 한다. 그럴수록 잠은 안 오고 그저 누워만 있는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만 자꾸 들었다. 이 비생산적이고 무료한 시간이라니... 해본 사람이 한다고 내 체질은 아닌 듯 싶었다.

그리고 나서 마무리로 발 마사지를 해 주는데 이건 할 만했다. 발가락에서부터 정강이에 이르기까지 마사지를 하고 발바닥을 쳐서 자극을 주니 온몸의 피로가 풀리고 붓기가 내리고 아주 좋았다. 이 발 마사지가 아니었다면 얼굴 관리와 남의 호의까지도 다 무효가 될 뻔하였다. 상반신이 해방된 상태에서 받는 발 마사지는 우선 자유로워서 좋았다. 지압을 해주는 미세스 최 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내 나이 또래의 그녀는 북경과 가까운 도시 상경에서 지압 선생이었다고 한다. 큰돈을 치르고 미국까지 오게 되었고 중국의 딸과 남편에게 생활비를 벌어 부친다고 한다. 작년 한 해에 3만 불을 부쳤는데 중국수준에서 보면 아주 큰돈이라고 한다. 중국 중산층의 10배정도 수입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도나도 미국으로 외화벌이 오려고 애를 쓴단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미국생활에 흡족해 하는 듯 보였다.

매일 중국의 남편과 전화 통화를 하는데 늘 "남의 발을 주무르는 천한 일 하느라 고생 많다"는 말로 마무리를 한단다. 자신의 남편은 고생을 덜 해봐서 철이 없다며 자신은 한번도 발 마사지를 천한 일로 생각도 안 해 보았을 뿐더러 그만둘 마음도 없다나? 남편분은 아마도 그 부인의 수고를 위로하려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이지 싶었다. 질 좋은 서비스를 받아본 사람들의 입 소문으로 이 업소에는 발 마사지 손님이 가장 많다는 것이다. 팁을 받는 서비스업이니 수입도 많을 수밖에...긍지와 자신이 넘쳐 보였다. 사실 미국에서는 직업의 귀천 같은 것은 염두에 두지 않고 산다. 이곳에 사는 한국인들만 유난히 몹쓸 직업, 고상한 직업을 따진다. 중국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 2세인 미세스 최 는 미국체질이 다 되었다 싶게 사고방식이 건전하고 오픈 되어있었다. 그사이 크리스천이 되었는지 하나님 은혜로 먹고사는 일이 순조롭다며 강조한다.

사람이 어려운 일에 직면하여 앞뒤에 의지 할 데가 없으면 마지막에 매달려 보는 것이 '절대자'에게 일 것이다. 내 머리로 이리저리 궁리 해 보다가 다 실패하고 나서 자포자기하는 순간에 절대자의 도움은 시작된다. 처음 미국에 도착하여 막막한 미세스 최 는 식당에서도 일해보고 사우나에서도 일해보았다고 한다. 직업의 귀천을 떠나 자신과 맞지 않는 일이어서 갈등이 많았다고 한다. 6개월 여 궁리 끝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두드려본 집이 이 집이었단다. 자신의 배경을 말하자 바로 그날로 채용되었는데 이 업소의 주인은 목사님의 사모님이시다. 적성에 맞는 일을 즐겁게 할 수 있게 되어서 일이 재미있다고 행복해한다.

그녀의 미국 적응기를 일일이 쓸 수는 없으나, 듣자니 순간 순간마다 보이지 않는 손길이 함께 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크리스천이 아닌 이들에게는 그걸 꼭 주님이라고 고집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각자의 믿는 신이나 조상의 음덕, 또는 가족들의 응원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다만 내가 아닌 다른 절대의 힘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살면 인생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살다보면 자신을 절대자보다 우위에 두는 사람들을 만난다. 학력이나 집안 배경, 재력 등을 인생의 전부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가진 것으로 인해 무서울 것이 없는 이들이다. 나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음은 부끄러운 고백이다. 어느 하나 딱 부러지게 내 세울 것도 없는 나였지만 우물안 개구리 같은 또래집단의 최면 같은 것에 걸려있었다. 하나님이 교만한 나를 고쳐 주시려고 미국에 보내어 갖은 고생 하게 한 것이 아닐까. 내가 미국에서 경험한 직업을 다 써 보자면 baby sitter, 옷 수선, 꽃 디자이너, 인형 만들기, 밤 청소는 유학 시절의 경험이고 영주권을 받고 나서는 secretary, accountant를 거쳤고 그리고 순전히 내가 우겨서 길지 않지만 다방 마담(?)을 해 보았다. 지금은 글쓰기와 함께 남편의 사무실에서 accounting을 하고 있지만 말이다. 지나고 보니 고생은 내 인생의 거름이 되었고, 경험들은 추억이 되기도 하고 지금의 글쓰기의 재료로 잘 쓰여지고 있다. 그러니 '고난 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는 말이 새록새록 와 닿는다. 우리에게 그냥 생기는 사건이란 없는 것이다. 좋은 일은 좋은 대로 노력하면 때가 온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고, 나쁜 일은 나쁜 대로 겸손을 배우고 분발을 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손도 못 쓸 정도로 내 건강이 바닥이면, 나의 사업이나 가정이 바닥을 치고있으면 이제야 터닝 포인트가 왔다 생각하고 잠잠히 결과를 기다릴 일이다.

발 마사지사인 미세스 최 의 간증을 듣다가 감동이 되어, 발 마사지 열 번 받는 쿠폰을 비상금을 털어 덜컥 샀다는 것이 아닌가? 덤으로 발<바닥을 치는>일이 열 번 있을 것이니 바닥을 치고 나서의 기대감에 적어도 열 번은 잠기게 되었다. 이번의 바닥 치기는 정말로 즐거운 바닥 치기가 될 것이다.

<미주판 한국일보/문인광장/3월 8일 200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