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더위 폭염 속에 소나기가 한줄기 시원스레 내렸다.
열대지방의 스콜을 연상시키는 빗줄기를 바라보다 불현 듯 어린 시절 외가에서 지냈던 일이 떠오른다.
어머니가 몸이 약하셔서 나는 유년시절을 외가에서 많이 보냈다.
토지개혁이 끝난 뒤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외가는 풍요를 누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지금도 즐겨 입에 오르내리시는 외가의 넉넉함은 마치 1세기 전의 이야기만 같다.. 소약한 어머니가 눈빛을 초롱이며 외가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 정말 인간의 기억은 오래된 것일수록 생생하다는 느낌을 받게된다. 그 기억의 한 쪽 끝에는 언제나 삼봉이네가 등장한다. 아스라하기도 하고 가슴이 메어질 듯도 한 삼봉이네는 그때 외가를 지키며 숯을 굽고 있는 화전민이었다.
산속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삼봉이네는 옆집과 함께 외가의 숯을 굽고 있었다. 내 어린 기억에도 약간의 변덕 기가 묻어있는 우리 외조모지만 삼봉이네에게만은 참으로 극진하셨다. 삼봉이는 나와 동갑이었다.
어쭙지않게도 그시절 외가를 가면 행랑채에 있던 아범까지 나를 애기씨라고 부르며 저녁이면 업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삼봉이네 아버지가 숯을 구워 외가에 내려오는 날이면 어린 삼봉이도 아버지를 따라 나들이를 한다. 종일토록 숯가마를 진 삼봉아버지는 땀에 흠뻑 젖은 등으로 애기씨 업어주고 간다며 나를 업어주는 것이다. 지금도 기억나는 삼봉아버지의 넓은 등은 약간 굽어 비스듬히 휘었으며 어린 내 느낌이었지만 가난이 덕지덕지 앉은 궁핍을 나는 그 등에서 느꼈던 것 같다. 그럴 때 삼봉이는 제 아버지 곁에서 할머니가 쥐어진 누깔사탕을 빨고 있었다.
그런데 장마가 며칠동안 계속되던 여름 어느날이었다.
숯이 다 떨어져 가는데도 삼봉이네서 연락이 없었다. 전화도 불통이던 그 시절 , 소식을 알려면 인편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왠일인지 외조모가 주섬주섬 옷을 입으신 뒤 나를 앞세우시고 삼봉이네 집을 향해 떠나시는 것이었다. 행랑어멈을 자신이 가겠노라고 야단이었지만 할머니는 꿈적도 아니하셨다. 빠른 남정네의 걸음으로도 반나절이 족히 걸린다는 산길은 내게는 고역이 아닐 수 없었는데 할머닌 특유의 직감으로 무언가 지피시는 게 있었던 듯하다.
아침에 떠났지만 오후늦게서야 삼봉이네 숯막에 다달았다. 마당 한가운데 연못까지 있는 외가의 풍요로움과는 비교도 되지않게 삼봉이네 집은 초라한 오두막이었다.
머리를 온통 풀어헤친 듯한 남루한 삼봉이네 아버지가 외조모를 알아보고 뒤곁에서 허겁지겁 달려나왔다.
"이 사람아 집안에 무슨 일이 있었나? 왜 소식이 없었지?"
삼봉이네 아버지는 외조모 앞에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한 채 흐느끼고 있었다.
"애 어멈이 말입니다......."
삼봉이 아버지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동안에 삼봉이네 집엔 엄청난 일이 일어났었다.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여섯이나 되던 삼봉이네 집에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던 날 아이 어머니는 사산을 했고 기진맥진한 산모도 기어이 눈을 감았다.
며칠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
외조모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셨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어쩟거나 산사람은 그래도 산다네. 저 어린 것들 누가 거둘 셈인가 자네가 정신차려야지.....
가끔 집에 내려오던 저 아인 당분간 내가 데리고 있겠네" 하시며 삼봉이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아이구 마님......"
외조모는 삼봉이 손을 잡으시며 '어서 내려가자' 하시며 아이를 앞세우셨다.
밤이 깊어서야 우리는 집에 돌아왔다. 삼봉 아버지의 '아이구 마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처음엔 잘 몰랐지만 세월이 흐른 뒤에 생각해 보면 그 의미야말로 여러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지닌 비명과 같은 소리가 아니었나 한다.
처음 며칠을 삼봉이 밥 숟가락이 남산만 하다고 사람들이 수근거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가 통 밥을 입에 대지 않기 시작했다. 어른들은 다시 수근거렸다.
그 때쯤 아버지의 전근으로 나는 더 이상 외가의 신세를 지지 않게 되어 내 유년의 추억은 끝을 맺은 것 같다. 가끔씩 풍문처럼 어느날 삼봉이네가 숯막을 떠났다느니, 그전엔 아버지가 고주망태가 되어 어린 삼봉이가 제 아비를 끌고 다니느라 고생이라는 이야기가 풍문처럼 바람에 떠돌고 있었다.
할머닌 삼봉이를 시골 초등학교에 입학을 시켜 공부를 시키려 하였는데 아이는 학업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지 늘 산으로만 쏘다녔다고 한다. 그대신 산을 탈 때는 다람쥐처럼 민첩하고 풀이라고 베어오라면 다른 사람의 서너배를 너끈히 베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에게 남겨진 짐은 너무 가혹했던 듯 하다. 형제들도 모두 뿔뿔히 흩어지고 병든 아비는 예전처럼 숯을 굽지도 못한 채 알콜중돌자가 되어 피폐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심지어는 쇠락해 가는 가문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때는 위용을 떨치던 외가였는데 할머니를 향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행악까지 저질러 이모들을 분노케도 했었다.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한세대가 모두 끝나버린 것처럼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이 많이 돌아가셨는데 우리 어머니만 그래도 살아계셔 옛날의 이야기를 추억처럼 가끔씩 꺼내시는 것이다. 모처럼 친정엘 갔다. 종일토록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장성한 형제들은 모두 집을 떠난 뒤라 노년의 어머닌 많이 외로우시다. 어머니의 유일한 즐거움은 추억 떠올리기. 우리 형제가 어머니를 가장 즐겁게 해드릴 수 있는 일은 바로 어머니에게 유년시절을 회상토록 해드려 풍요의 산실과 같았던 어머니의 장원에 잠기게 해드리는 것이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다 갑자기 삼봉이네가 생각났다.
"엄마 삼봉이네 지금도 기억나우?"
"그럼 생각이 왜 안나. 얘 그런데 삼봉이가 얼마전에 죽었다더라"
"아니 엄마가 어떻게 삼봉이네 소식을 들으셨어?"
"왜 있잖니 숙자에미라구 옛날 외가에 일년에 서너번씩 찾아와 이것저것 물건 안기고 떠나던 과수댁 말이야. 아직도 그이가 가끔 친정동네 소식을 물어오곤 하는데 얼마전에 삼봉ㅇ가 고생고생 하다가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드라. 어찌나 마음이 아프던지..... 부모 복 없으면 모든 복이 사라지는 모양이야."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려고 꺼낸 외가의 이야긴데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린 것 같다.
왜 삼봉이 아버진 아내의 죽음으로 폐인이 되어버렸을까? 아무리 환경이 어렵다 하더라도 외가의 숯을 댈때만 하더라도 부지런하고 순박한 시골 남정네였는데...... 그러나 아비의 고통을 그대로 이어받아 고달픈 삶을 살았어야 했던 삼봉이의 삶은? 이상하리만큼 삼봉이를 향한 내 의문점은 지워지질 않았다. 너무 억울한 인생살이란 생각이 자꾸만 든다. 어머니만큼 나도 삼봉이네 일가에 대해 마음 한구석을 열고 있는지 모르겠다.
갑자기 삼봉이가 떠오른 것은 사실 뒷마루에 떨어지는 빗방을 때문이었다.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때의 일이다.
바로 오늘처럼 비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연못 오른 편에는 오래된 수양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얼마나 자연스레 위어졌던지 동네 고마들의 놀이감으로 최고였다. 할머니만 안 계신면 아이들이 몰려와 법석을 떨며 나무를 못살게 굴었다. 감봉ㅇ가 온지 며칠 되지 않아서였다. 밥만 많이 먹는 아이라는 이야기거리 밖에는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하던 삼봉이가 하루종일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그런데 사실 삼봉이가 있는 곳을 나는 알고 있었다.
어른들은 비가 오니까 미처 연못엔 가보질 않았다. 그런데 할어버진 사랑에서 밖을 내다 보던 내누에 수양버들 사이에 기대어 하염없이 울고 있는 어린 삼봉이가 들어왔다. 밥먹을 시간이 되어도 삼봉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뭐라고 그럴까 나는 그 때 삼봉이 있는 곳을 어른들에게 전하지도 않았지만 그 어깨에 드리워진 그늘의 흔적을 읽었다고나 할까? 설명할 수 없는 어둠의 실체를 조금은 바라본 것 같았다. 삼봉이 인생에 걸쳐있는 이른 예감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린 나는 그 사실을 가슴에 꼭꼭 묻어 두었다. 훗날 어디선가 삼봉이 이야기가 나오면 제발 내 이른 예감이 빗나가길 고대하면서 말이다. 색감으로도 기억되는 삼봉이의 잿빛 그림자, 아이의 흐느끼는 울음 소리는 공감각 형상까지 빚어내며 내 어린 시절을 우울하게 만들어주는 추억이었다.
치매가 제일 두려우신 어머닌 온통 치매에 관한 책과 신문기사를 스크랩해두신다.
"얘 왜 기억이란게 오래된 것일수록 생생하고 최근의 것은 도무지 떠오르는게 하나도 없는지 모르겠다."
어머니의 그 이야기 속에는 당신의 남은 기억은 온통 유년시절 이야기 뿐이라는 느낌을 우회적으로 전하시는 것 같다.
훗날 나도 그럴까? 나이 먹으면 어머니가 뛰어놀던 그 장원같던 언덕이 내게도 고스란히 살아서 뇌리를 온통 덥게 될까. 아룰러 삼봉이네 일가의 비극적인 사건도, 그대로 전해져 슬픈 이야로 남아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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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나를 용서한다.
금년에 내가 하는 일들 중에 획기적인 일 하나가 아침운동이다.
나는 다른 일을 하는데는 비교적 부지런한 편인데 몸을 사용하는 일에는 영 자신이 없다. 하루종일 앉아서 책을 보거나 원고를 쓰라면 별 무리 없이 해내지만 서너 시간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해야한다면 이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점점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몸을 위함이라기보다는 일을 하기 위한 하나의 수순 밟기였다. 몸이 둔해지면서 머리까지 둔해져 참신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질 않는다.
궁여지책으로 아침운동을 시작했다. 일주일의 절반은 공설 운동장에 나가 트랙을 돌고 절반은 골프연습장에 나간다. 골프는 다행히 팀이 있어 아침마다 채근해주는 이웃이 있어 그나마 연습장엘 나가지 그런 이웃들이 없었더라면 아마 시작도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내게 적성에 맞는 운동은 골프보다는 트랙을 도는 편이 훨씬 부담스럽지 않다. 골프는 보통 스트레스를 받는 운동이 아니다. 공이 맞지 않을 때, 또 시원스레 쭉쭉 뻗어나가는 이웃들 틈에서 주눅들 때의 심정을 헤아려 보면 '왜 이 운동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종종 좌절감에 빠진다.
그러나 트랙을 돌 때는 가끔 무아지경에 빠질 대도 있어 아마 이웃들의 성화가 멎어진다면 나는 아침마다 운동장에만 나가 있을 것 같다.
처음 트랙을 돌 때는 한바퀴를 돌 때마다 따로이 계획을 세웠다. 왠지 무의미하게 도는 시간이 아깝단 생각이 들어 처음엔 로사리오 기도를 한 꿰미씩 드렸다.
운동장에 나가면서 그날 기도를 드릴 제목을 모두 정리해 가지고 나가 차례차례 기도문을 펼쳐 나갔다.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아픈 이들을 위하여' '굶주리는 먼 나라의 어린이'까지 왠지 이 아침에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기도를 드린다면 너무 이기적이란 느낌이 들어 하느님의 나라의 뜻에 기초를 둔 기도를 선별했다. 그랬더니 트랙을 도는 것도 골프 칠 때와 버금갈 정도로 신경이 많이 쓰이는 것이다. 우선 이 기도가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한 기도인가에 관한 검증을 해야 하는데 그것만으로도 꽤 시간이 걸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도문을 놓고 검색작업을 하다가 스스로 저 가슴 밑에서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의 교만을 깨우는 소리였다. 감히 하느님에게조차 하찮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내적 자만이 머리를 들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과 가족과 직장을 위한 기도를 회피하면서 먼 나라의 평화를 간구 하는 기도가 하늘의 진정 원하고 있는 기도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언젠가 동생이 몹시 중병을 앓고 있는데도 자신은 그 아우를 위한 기도를 드리지 못한다는 사제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럴 때 나는 '신부님 당신은 정말 무언가를 잘못 선택하고 계시군요'하는 느낌이었는데 내 모습이 영락없이 그 사제를 닮은 것 같다.
그래서 다음 날부터는 나는 기도를 드리지 않기로 했다. 복잡하게 계산해서 드리는 기도를 하느님이 기쁘게 받으실 이유가 없으실 것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기도 자체에 대해서도 자유롭고 싶었다.
운동장을 돌다가 무아지경에 빠지게 된 것은 그 다음부터였다. 전신이 땀에 젖어 겉옷가지 짜야 할 정도로 흠뻑 젖어본 것은 내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무 생각도 일지 않다가 어느 날 불현듯 내 몸 어느 곳에서 이는 고요한 움직임에 귀가 열렸다. 어디선가 아우성치는 내 속의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되었다. '불쌍한 나의 팔 주인을 잘못 만나 혹사당했구나'하는 위로를 내게 나눠 줄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조금만 트랙을 돌아도 절기 시작하는 다리에게는 나래를 펼만한 기회를 주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정중하게 사과를 할 때도 있다.
몸 속에서 이는 소리를 들으면서 제일먼저 깨닫게 된 것은 그 동안 너무 내 몸을 혹사시켰다는 점이 있다.
제대로 된 글 한편 쓰지 못하면서 몸만 무리하게 부렸으니 한심한 일이다. 몸이 울리는 비명소리조차 듣지 못하고 사는 나날이었다.
비로소 나는 요즘에서야 게으른 내 자신을 용서하기로 하였다. 더 이상 안달하며 시간을 의미 있게 쓰기로 하였다. 더 이상 안달하며 시간을 의미 있게 쓰기 위하여 이것저것을 헤아리지 않게 되었다. 종일토록 누워서 빈둥대는 나는 얼마나 우아하던지 내게 최상의 서비스를 할 때도 있다. 그리고 무언가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죄의식이 들어 '게으름은 곧 죄악이란 등식'을 갖고 있던 내가 게으름에 대한 예찬을 서슴없이 늘어놓을 때도 있다. 더군다나 성당에서 공인으로서의 기도를 올리는 이들에게 점수를 주기 시작했다. 얼마나 우선적이지 않으며 살뜰한 모습인가. 하느님은 어떻게 보시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늘도 골프 치러 가자는 이웃들의 성화와 운동장을 돌아야겠다는 나의 욕구가 상충하는 아침을 맞았다. 30분 뒤에 내가 어디 가 있는 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순간순간 흐름에 최선을 다한다는 의지일 뿐인데 이른 아침부터 벗을 깨우는 이웃의 사랑이 얼마나 가상던지 아무래도 오늘은 그곳에 더 후한 점수를 줄 것만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