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이 종 옥

여름이 깊어가면서 가을이 기다려지는 요즘이다. 아파트 단지나 오래된 정자 주변에서 간혹 산뜻한 진분홍색 혹은 흰색의 꽃을 피우는 꽃나무를 볼 수 있다. 라일락 같기도 한데, 자세히 보면 레이스 같은 작은 꽃잎이 라일락의 것은 아니다. 바로 목 백일홍이라 불리는 배롱나무이다. 백일홍은 두 가지가 있다. 화단에 심는 초본성과 나무에 꽃을 피우는 목본성이 그것이다. 두 식물은 사실 식물학적으로 전혀 다르다. 백일홍은 국화과에 속하는 초본성이고, 목 백일홍은 부처 꽃과에 속하는 목본성이다. 모습을 보아도 두 식물이 왜 같은 이름을 가졌는지 이상할 정도이다.

그것은 꽃철이 한 여름 100일 이상 간다는 공통점 때문인 것 같다. 두 식물 모두 작은 꽃들이 차례로 피고 지면서 100일 동안 꽃핀다. 이 꽃이 지면 가을이 오고, 그래서 목 백일홍의 꽃말이 “떠나간 벗을 그리워함”인가 보다.

배롱나무는 중국이 원산지로 우리나라에서 자생하지는 않는다. 즉, 심어서 가꾸어야 자라는 나무이다. 그런데도 옛 건물이나 산소 주변을 보면 오래 전부터 배롱나무가 심어진 흔적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또 부산직할시에는 800년 된 배롱나무가 천연 기념물 제 168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참고로 배롱나무는 경상남도의 도화(道花)이다. 예부터 선비들이 풍류를 읊는 곳에 이 나무 한 그루쯤은 있었다고 하니, 그것은 짙푸른 녹음 중 피어나는 고운 꽃 색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자생하지는 않지만, 예부터 사랑을 받아온 꽃나무이다. 그래서 배롱나무는 무궁화, 협죽도(유도화)와 함께 우리나라의 여름을 대표하는 3대 꽃나무 중 하나 이다. 낙엽성 교목으로 나무 높이도 2～4m로 그리 크지 않다. 꽃은 7～9월에 걸쳐 피며, 10월이 되면 둥근 열매를 맺는다. 중부 이남에서만 자라며, 충남 이남에서만 겨울을 날 수 있다. 햇빛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 그루가 양지 바른 곳에 홀로 서서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는 사찰이나 생 울타리용으로 많이 심었으나 최근에는 학교, 병원, 관공서, 병원에서 볼 수 있고 특히 꽃이 아름다워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당긴다.

배롱나무를 정원수로 키울 때는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우선은 방한 대책이다.

추위에 약하기 때문에 겨울에는 짚으로 싸 주워야한다. 배롱나무는 여름내 빨갛게 피는 꽃도 좋지만 매끄러운 줄기가 더욱 인상적이다. 매끄럽고 윤이 나는 껍질이 아름답고 나뭇결이 곱고 재질이 단단하여 여러 가지 세공품을 만들기에 좋다고 한다. 고급 가구나 조각품, 장식품을 만드는 데 귀하게 쓰인다.

배롱나무는 여성들한테 흔한 병인 방광염, 곧 오줌소태에 특효가 있다. 방광염에 동쪽으로 뻗은 배롱나무 가지 1냥(35～40g 정도)을 달여서 한번에 마시면 즉효를 본다고 한다. 동쪽으로 뻗은 가지에 약효 성분이 가장 많이 모여 있기 때문이다. 붉은 꽃 피는 나무보다는 흰 꽃이 피는 나무가 약효가 더 높다고 한다. 또 배롱나무 흰 꽃은 먹을 수도 있다. 그늘에서 말려 차로 달여 먹거나 기름에 튀겨 먹거나 국을 끓여먹는다. 배롱나무 뿌리는 어린이 백일해와 기침에도 상당한 효과가 있고 여성들의 대하증, 냉증, 불임증에도 배롱나무 뿌리가 좋다. 몸이 차서 임신이 잘 안 되는 여성은 배롱나무 뿌리를 진하게 달여서 꾸준히 복용하면 몸이 차츰 따뜻해지고 혈액순환이 좋아져서 임신이 가능하게 하는데 효과가 있다고 한다.

백일홍에 대한 설화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인신공희 및 영웅의 괴물퇴치 모티브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벼랑으로 떨어져 죽은 두 처녀에 관한 것이다.

옛날, 어느 어촌에는 해마다 목이 셋이나 달린 이무기에게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한다. 어느 해에는 김 첨지의 딸 차례가 되어 모두 슬픔에 빠졌는데, 뜻밖에 늠름한 용사가 나타나 자신이 이무기를 처치하겠다고 자원했다. 처녀는 보은의 뜻으로 용사에게 혼인을 요청하였으나, 용사는 처녀에게 지금 자신은 이무기를 죽이러 가는 중이니 100일만 기다리면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용사는 처녀에게 자신이 타고 가는 배가 돌아올 돛이 흰색이면 자신이 살아 있는 것이요, 붉은 돛이면 죽은 것이라는 뜻임을 말해주었다.

처녀는 100일 되기를 기다리며 매일 높은 산에 올라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100일 째 되는 날 용사를 태운 배가 나타났으나 돛은 붉은 깃발이었다. 처녀는 절망한 나머지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결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실은 용사가 이무기와 싸우다 이무기의 피가 돛을 물들여 흰 돛이 붉은 돛으로 된 것이었다. 급히 오느라 용사는 자신의 약속을 잊은 것이었다. 그 뒤 처녀의 죽은 자리에서는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났다. 이 꽃을 사람들은 백일기도를 하던 처녀의 넋이 꽃으로 피어났다고 하여 백일홍이라 불렀다고 한다. 백일홍의 이름은 100일 동안 꽃이 붉게 핀다는 뜻이다.

부처 꽃과에 속하는 갈잎 떨기나무인 배롱나무의 한자 이름도 百日紅 또는 木百日紅 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전설은 배롱나무에도 적용시키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의 꽃 전설의 백일홍은 국화과에 속하는 한해살이 풀을 일컫고 있다.

창문을 열면 폭포처럼 밀려드는 목 백일홍의 그윽한 향에 그만 매료되고 만다. 그 향기는 피아노 선율과 같이 은은하기도 하고, 물로 씻긴 분홍색깔의 꽃은 군자나 여인 같기도 하다. 그래서 배롱나무 한 그루는 녹음 짙은 숲 속의 파아란 바람을 녹여내고, 우리들 가슴에 황홀한 사랑의 멜로디를 흐르게 한다.

배롱나무는 내 마음 밭에 맑은 영혼의 씨앗을 뿌리고, 학이 춤추듯 물새가 자맥질하듯 산 위를 빙빙 도는 솔개 같이 신비로운 천상의 아름다움에 빠지게 한다.

한 그루의 배롱나무는 삼복더위를 잠시 잊게 해주는 파도소리 같기도 하다. 또 내 안에 날아든 향기로 온몸 휘감기는 순간, 그때는 깊고 밝은 사랑을 하고 싶어지기도 한다. 삶의 깊이를 느끼고 싶은 날, 한 잔의 커피와 친구 사이가 되고 싶은 날처럼 내가 좋아하는 배롱나무와 함께 있기만 해도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은 나만의 호사인가?

행복한 웃음보다 우리의 얼굴 모습을 밝게 해 주는 화장품은 없다. 배롱나무 꽃은 아름답고 환한 웃음을 전달해 주는 밝은 표정의 화장품 역할도 해준다.

석 달 열흘 한 여름 작열하는 태양을 견디며 애절하도록 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전설까지 지닌 배롱나무 꽃이 지고 나면 쌀밥을 먹게 된다고 한다.

찜통더위에도 지칠 줄 모르고 아름다운 자태를 변함없이 지켜가며 꿋꿋하게 지키는 배롱나무에게서 인내를 배운 것 또한 즐겁기만 한 일이다. 그리고 그 인내 끝에 수확의 기쁨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배롱나무에게서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