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쯤전 수줍게 피어난 두 세송이의 꽃을 보았는데 오늘은 셀수도 없이 많은 꽃이 예쁘게피었습니다. 마산에 다니러 가신 시어머니가 골절이 되어 입원을 하셨고, 친정어머니가 노환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통증의 고통을 호소하셔서 우울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 요즈음입니다.

조금 전에는 선배의 사업이 부진한 이야기와, 결혼 1년만에 파경을 맞은 딸아이 이야기를 하면서 울먹이는 또 다른 선배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두운 마음이었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바람에 흩날리는 자목련과 복사꽃 잎을 보며 나도 모르게 입 속에서 감탄의 소리가 나왔습니다. 키가 큰 꽃사과나무에 달린 예쁜 분홍 꽃이 바람에 너울거리는 것을 보니 이렇게 속이 후련해 질 수가 있는지요? 조금전의 우울한 마음이 바람과 함께 날아가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조금 걷다가 제비꽃을 만난 것입니다.

밭둑에 피어난 보라 꽃을 본 것이 대여섯살 적이었던 것 같은데, 선명한 보랏빛이 늘 머리에 남아 있습니다. 초등학교때 가장 좋아하는 꽃은 제비꽃이라고 서슴없이 말했고, 중.고등학교 때는 모교의 교화인 영란꽃까지 자그마한 두가지의 꽃이 제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꽃꽂이를 배우고 가르치며 십 여년 여러 가지 꽃을 대할 수 있었습니다. 장미, 백합, 국화 같은 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브바르디아, 리시안셔쓰, 스토크, 고데치아 등 많은 꽃을 알게 되었고, 여우 얼굴을 닮은 노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휙스훼이스를 처음 볼 때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초록색을 좋아하는데 이상하게도 용담, 라일락, 도라지꽃, 제비꽃 등 보랏빛의 꽃이 좋습니다. 많은 꽃을 대하며 사람마다 개성이 다르듯 꽃도 제각각의 아름다움과 특성이 있음이 새로웠고, 한참 꽃에 빠져 살 때는 꽃을 보며 고통을 털어 냈습니다. 사파리 선 셋이라는 석양빛의 관엽 앞에서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 한참을 서서 작은 모습의 앙증맞은 보랏빛 꽃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꽃에 태양은 고루 비추고 있고, 조그만 일에도 짜증내는 지금의 내 모습과 채울 수 없는 욕망 때문에 언제나 헐떡이는 나를 다독이려는 듯 제비꽃은 웃고 있었습니다.

욕심을 털어 내라고, 매사를 급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세상은 순리대로 살아지는 것이니 어른들 일도 편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살아가라고 가르쳐 주는 것 같았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자신의 일로, 가족의 일로 참 힘이 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생은 고해라는 말이 꼭 맞는 말 같습니다. 제 각기 지고 가야 할 고통의 등짐을 어떻게 벗어버릴 수 있는지 그 작은 꽃은 알고 있는 것 같더군요. 욕심 없이 작은 땅에서 해마다 포기를 늘리며, 많은 꽃을 피우는 자신들을 보라고, 사람은 마음먹기 따라 천당과 지옥의 마음으로 살수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복사꽃잎이 또 눈처럼 날렸습니다.

우아한 꽃의 대명사 같은 자목련 꽃잎은 누런색으로 변한 채 땅위에 떨어져 있습니다. 저렇듯 크고 당당하던 꽃이 지면 제비꽃 자신보다 더 추한 모습을 보인다고, 사람의 삶도 저와 같을 것 아니냐고 웃으면서 나에게 속삭였습니다. 십 여년전 나는 웃는 사람을 보면 저 사람들이 정말 행복해서 웃을까 하는 생각을 꽤 오랫동안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내가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 때라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바닥난 우물처럼 내 마음에서 웃음을 퍼 올릴 수 없었으나까요. 소아암에 걸린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웃음은 울음일 것이고, 세상이 자기 것인 양 큰소리 치며 수백 억을 사과상자에 넣어둔 사람의 억지 웃음도 울음일 것입니다.

작은 것을 쪼개어 남과 나누고, 자식과 부모가 정겨운 대화를 나눌 때, 이웃끼리 작은 정이 묻어오는 인사를 나누며 밀전병 한 쪽을 나누어 먹을 때의 웃음이 진정 행복한 웃음이 아닐는지요. 은행에를 갔습니다. 그곳에는 활기 있게 살아가는 사람, 그냥 그냥 살아가는 사람, 하루 하루가 힘겨워 헐떡이는 사람이 모여 있는 것 같더군요. 세상일이 마음대로 안돼는 것을 익히 알기에 짜증을 훌훌 털고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불쑥 힘겹고 짜증나는 일이 또 생기겠지만 무엇이든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해 보렵니다. 돌아오는 길에도 제비꽃은 그냥 그 자리에 곱게 피어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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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발

"그렇게 큰 구두는 없습니다".

십 여년 전의 일로 기억된다. 245사이즈의 구두를 찾던 내게, 제화점 점원은 점잖게 찬물을 끼얹었다. 무참해진 기분으로 우두커니 서있던 적이 있다. 유난히 넓적한 발 때문에 놀림을 많이 받았지만 그때처럼 무안하던 적은 없었다. 힘들이며 골라도 구두를 신고 다녔지 맨발을 벗고 다닌 줄 아느냐고 쏘아줄 생각을 한 것은, 그 가게를 나와서 한참 후에 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그 상표의 구두를 신지 않았다. 평균치의 발보다 새끼발가락 하나는 더 넓은 발이 나의 발이다. 어려서부터 족보에 없는 마당발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아버지는 손발이 커야 잘 산다고 하셨다.

유난히 발이 크셔서 신발만 보고도 발 큰손님 오셨다는 말을 들으셨던 할아버지 이야기도 해주셨다. 격세유전이라더니 할아버의 큰발은 대를 건너서 나에게 유전되었나 보다. 좁고 갸름한 발을 가진 형제나 친구의 발을 예쁘다고 생각했으나 부럽지는 않았다. 모든 것을 좋은 쪽으로 가져다 붙이길 잘하는 나는, 나에게 알맞은 발이려니 생각하며 자랐다. 꼭 부자가 될 것이란 믿음을 가졌으며, 오빠들의 장난 섞인 놀림이 재미있었다. 운동화를 신고 다닐 때는 넓적한 발이 불편한 줄 몰랐다.

구두를 신기 시작한 다음부터 문제가 생겼다. 길이는 보통이고 볼이 넓은 발에 수난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제화점에서 구두를 고르 때부터 짜증이 난다. 콩쥐의 고무신을 억지로 신으려던 팥쥐처럼.....볼이 맞으면 길이가 남고 길이가 맞으면 볼이 좁아 들어가질 않는다.이것 저것 신어보다 발에만 맞으면 그것이 내 구두다. 모양이나 색깔에 신경을 쓸 수가 없다. 같은 값을 내고도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같은 뾰족하고 예쁜구두는 항시 그림의 떡으로 남아야 한다. 학교에만 다니고 별로 하는 일 없이 지낼 때는 어렵사리 골라 신은 구두 였지만, 넓적한 대로 매끄럽던 발 모양새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몇 년전부터 일을 가지게 되었다. 이곳 저곳을 다녀야 하는 내 발은 너무 힘에 겨워 모양을 예전처럼 지탱할 수가 없게 되었다. 제화점에서 점원의 감언이설에 속아 사 신고 나온 구두가 하루 이틀 신다보면 마가 생기는 것이다. 가게에서 신어 볼때는 잘 맞았는데 언제는 뒤꿈치가 껴서 터지고, 어느 때는 발가락에 물집이 생긴다. 발에 구두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구두에 발을 맞추는 형편이니 내 발은 성할 날이 없다. 몇 년 사이에 농투성이의 발처럼 거칠어졌다. 거칠어 질 뿐 아니라 뼈가 튀어나온 상태로 발의 모양도 변했다. 현대 병이라는 무지외반증 환자가 된 것이다.

작년이었던가? 정 다운 스님의 인생 십이진법이란 책을 재미 삼아 읽었다. 그 중에 생생히 기억되는 것은 사람들은 저마다 한 군데씩 복을 타고 태어난다고 한다. 어느 사람은 귀에 타고난 귀복, 어떤 사람은 코에 타고난 코복하는 식으로 각자의 복이 있다고 한다. 나의 생년월일과 맞추어보니 나는 발에 복을 타고 태어나 발복이 있다고 한다. 속으로 감탄을 하였다.

유달리 걸음이 빠른 나는 친구들이 발에 바퀴를 달았느냐는 놀림을 받는다. 같이 걸을 때 좀 천천히 걸으라며 몇 번이나 옷소매를 잡아 다닌다. 동행 없이 혼자 걷는 날, 나 스스로 문득 발을 멈추는 적이 있다. 앞에 가던 사람들을 거의 다 따라잡는 것이다. 너무 빠른 걸음이 무안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겸연쩍다. 저 여자 무슨 급한일이 있어 저토록 빨리 걸을까 생각할 것이다. 빠른 걸음이 민망해서 일부러 천천히 걸을 때 생각나는 일이 있다.

늦잠을 몹시 자는 며느리를 시어머니가 꾸짖었다. 며느리가 "어머니 잠 안자고 모아논 돈 나 좀달라" 하고 말했다고 한다. 그 방자한 소리가 생각나 웃을 때가 있다. 그토록 빠른 걸음으로 걸으며 혼자 부지런한 척 팔을 휘젓고 다니는 나를 보고 "그렇게 부지런히 다니며 한일이 무엇이냐고 " 사람들이 묻지 않을까 실소를 하게 된다. 그러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좋아하는 내 특유의 사고가 되살아난다. 발에나마 복이붙어 이렇듯 사방팔방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가?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발이 좀 밉기로 대수인가. 어느 때는 복이 붙었다는 내 마당발이 무한히 사랑스럽다. 구두를 고르며 잘 맞지를 않아 짜증이 날 때, 전족을 한 중국 여인을 생각했다. 어려서부터 넓적한 발을 붕대로 칭칭 동여매었으면 예뻐지지 않았을까 하는 망상도 해 보았다. 그러나 좁고 갸름한 외씨 같은 발이었다면 내 체중과 돌아다니는 힘을 감당못해 주저앉지는 않았을까.

마당발이기 때문에 그만큼 땅을 견고히 디디고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다. 남보다 유별나게 빠른 걸음도 내 발 때문이지 아닌지 해서 더욱더 추진력 있게 움직이며 일을 한다는 생각도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넓적하고 미운 발이지만 그 발에게 감사와 신뢰를 보낸다.

만약에 논공 행상을 따져 신체의 어느 한 부위가 벼슬을 내린다면, 나는 단연 내 마당발에 영의정을 제수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