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유화

임 승 렬

먼, 먼 옛날이었어요. 돛단배를 타고 섬 가까이까지 가서도, 바다가 조금만 성깔을 부리면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던 섬이 바로 흑산도였답니다. 푸르다 못해 먹물 빛이 된 흑산도이지요. 그래서 더더욱 외로운 귀양지로 널리 알려진 섬입니다.

일찍이 신라 흥덕왕 2년, ‘장보고’가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당나라와 교역할 때부터 사람이 정착하게 됩니다. 사뭇 이어 내려와 1967년 1월 1일, ‘신안군’에 소속할 당시까지 ‘월산군, 무안군’에 딸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4월이 문을 닫는 날이었습니다. 전날, 홍도에서 해상 관광을 끝낸 일행은 흑산도의 육로를 따르기로 했어요.

하늘과 함께 문을 열었다는, ‘개천장’ 숙소를 출발합니다. 옛것 없이 새로운 것이 있겠어요. 먼저, 선사시대 유적으로 추정되는 문화재 144호를 찾았습니다. 주인공을 알 수 없는 무덤이지만, 유한한 인간사가 무한하게 전승되는 한 구비였어요. 그런가 하면 사람의 그림자가 몹시도 그립던 당시였답니다. 먼 바다로 고기잡이 떠난 아비를 기다리던 피리부는 소년이 한 처녀와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얽힌, ‘처녀당’에서 예전에 읽었던 ‘순애보’의 가슴에 ‘초력목’ 푸른 잎 무늬를 놓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단 하나밖에 없다는 초력목이야말로, 흑산도 온 섬을 뒤덮은 동백(冬柏), 측백(側柏)의 대장 나무일테니 말입니다.

100여 개의 섬이 오밀조밀하게 떠 있는 다도해입니다. 그 가운데 맏형뻘이 되는 ‘대흑산도’는 이제 육지 손님을 맞기에 바쁩니다. 관광버스 기사는 교육을 받고 나왔어요. 고려 말과 신라 초쯤으로 간주된다는 문화재 석등, 석탑 반월성을 설명하는 폼이 전문가 못잖습니다.

구불구불 돌고 돌아, 봉화대로 옮겨갔어요. 서해 바다를 건너오던 중국 사신을 제일 먼저 맞던 곳이 바로 흑산도였답니다. 산위 봉화대에 불을 밝혀 이웃과 이웃 섬으로 통신을 하여 왕성(王城)에 이르게 했다는 ‘봉화대’랍니다.

점점이 떠 있는 크고 작은 섬은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곰도 되고 토끼로 바뀌기도 합니다. 내영산과 읍동 사이에 ‘백두산 천지연’이 나타나는 것도 다도해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일 거예요. 바다는 참말로 요술쟁이입니다. 바위에 뚫린 동굴이 우리나라의 지도 모양이기도 하지만, 간첩일당을 일망타진한 동굴도 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 버스는 자꾸만 올라갔어요. 마침내 ‘삼라산’ 정상 쉼터입니다.

멀리 다물도와 대문도가 떠 있습니다. 언저리를 맴도는 갈매기의 날갯짓이 부산합니다. 바다의 삶도 수월 할 수만은 없을 거예요. 문득, ‘칠락산’ 너머 면암 최익현 선생의 유배지와, 선유산 자락 아래 손암 전약전 선생 유배지가 생각났어요. 바닷새의 한살이가 아무리 치열하다 해도, ‘귀양살이’는 없을테니 말입니다.

손암(巽庵)은 신유사옥(辛酉邪獄; 1801년)으로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자산어보(玆山魚譜) 등 연안 물고기에 관한 저서를 완성했습니다.

조선왕조 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실정을 상소하고,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퇴, 쓰시마(對馬島)에 유배됩니다.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고 거절, 단식 끝에 굶어 죽은 면암(勉庵)입니다.

“어머머, 이 꽃 좀 봐. 무슨 동백이 이처럼 앙증맞지. 맞아, 꽃은 작은 꽃이 예뻐…”

나는 친구가 호들갑을 떠는 흑산도 동백으로, 소월의 ‘산유화(山有花)’를 연상했어요.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큼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야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이 지네 꽃이 지네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여름 없이 꽃이 지네

꽃이 지네 지네

흑산도 동백나무는 다 같은 중간 키 입니다. 어느 해 겨울, 땔감이 모자란 마을 사람들이 오래된 동백나무를 몽땅 베다 땠답니다. 그러나 나의 산유화는 물소리 바람소리를 벗삼았던 면암과 손암 두 분 선생시절의 꽃이었어요. 산에는 꽃이 피네 꽃이 피네 피네, 흑산도 동백이 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