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소리의 희로애락(喜怒哀樂)

나의 유년 시절에는 한 동네에 대여섯 집만 기와집이고 대부분 초가집이었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한집 두집 양철지붕으로 바꿔가기도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우리 마을에 분교가 생겼다. 부근의 몇몇 부락 아이들은 2학년까지 분교로 다녔다. 그 교실에서 천정을 쳐다보면 얽혀있는 서까래 위에 재색빛 양철 지붕이 얹혀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초가집에서는 듣지 못했던 빗소리를 처음 들었다. 한두 방울씩 또독 또독 천천히 내리더니 점차 빠르게 후둑 후둑 양철지붕을 두들겼다. 빗방울들이 양철지붕을 타고 노는 듯 했다. 그렇게 한참 쏟아진 비가 슬며시 그쳐가면, 빗소리도 점점 약해지다가 멀리 사라진다.

무더운 여름날 한참 공부할 때 갑자기 비가 내렸다. 항상 듣기 좋았던 그 소리들이 나를 즐겁게 했다. 아이들도 빗소리에 정신이 팔려 조용하다. 우리는 빗소리의 크기나 빠르고 느린 속도까지도 알 수 있었다. 높다란 천정에서 똑 똑 똑 소리가 나면 ‘어메, 비오네!ꡑ유리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들은 선생님 눈치를 살피면서 마음이 들썽거려 운동장만 힐끔힐끔 바라본다. 우리들 마음도 모르고 억지로 설명하시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높아만 갔다. 나는 빗소리에 온통 신경이 쏠려 공부에 흥미를 잃어간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이 교무실로 가시자마자, 우르르 창가로 몰린다. “와! 비다. 비!” 톡톡 튀며 내리는 빗소리를 듣고 아이들은 함박 웃으며,

“콩 볶는 소리다.”

“아니야, 콩 튀는 소리야.”

하며, 서로 우기는가 하면 손뼉을 치는 아이도 있었다. 조잘대는 친구들 소리와 양철지붕의 빗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교실안을 가득 메웠다. 어떤 아이들은 시끄럽다고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이리저리 뛰어 다녔다.

초가집에 살던 친구는 양철지붕 밑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부럽다고 한다.

“나는 커서 양철지붕 밑에서 살란다. 빗방울 소리 들으면 재밌것제.”

나도 그러고 싶었다. 양철집에서 사는 사람이 초가집의 사람보다 부자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멋진 빗소리도 들을 수 있을 테니까.

어느 토요일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가뭄이 심하여 대지는 목말라 있고 논바닥은 금이 쩍 쩍 벌어졌다. 몹시 무더운 데다가 먹구름까지 몰려오니 비가 올 것도 같았다. 어른들의 얼굴은 새까맣게 탔다. 땀에 젖은 잠방이를 걸치고 “하나로세, 둘이로세, 셋이로세......” 두레를 세어갈 때마다 비지땀은 비오 듯 하다.

두 사람이 둠벙 좌우에서 길다란 두레줄을 양손에 잡고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며 물을 품는다. 두레는 그네를 타듯 리듬에 맞춰, 둠벙과 논을 왔다갔다한다. 논은 조금씩 젖어가고 벼는 파르르 생기를 얻어갔다. 두레를 세어 가는 것이 재미있어서 한참 구경하다가, 집에 왔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가뭄 끝에 내린 소낙비는 잔잔한 먼지를 일으키며 흙냄새를 사방에 풍긴다. 며칠 전 어른들이 삼각산으로 올라가 기우제를 지냈기 때문에 하느님이 비를 내려 주셨을까? 시꺼먼 구름이 하늘을 뒤덮었다.

들에서 일을 하다가 의지할 만한 우리 집으로 사람들은 몰려들었다. 등받이를 흠뻑 젖은 채 장대비에 쫓겨 달음질쳐 오면서, 어머니는 환한 얼굴로 “약비다! 약 비” 하늘을 쳐다보며 손바닥으로 빗물을 받는다.

시원스럽게 빗줄기가 이어져 마당에 흥건히 내린다. 들일을 마무리하지 못한 어른들은 담배를 피우기도 하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다가 한잠 자기도 한다. 마루 밑에는 비 맞은 닭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다. 울타리에 축 늘어진 가죽나뭇잎들이 뻣뻣해지며 팔랑거린다.

나는 마루에 앉아 영어 숙제를 하다말고 비가 오는 걸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굵은 빗줄기는 마당 이 구석 저 구석에서 흘러내렸다. 불그레한 흙탕물이 모여들고 지시락물이 합세하여 토방 밑으로 돌아서 흐른다.

초가지붕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 위에 동그란 포말을 수없이 만들면, 나도 모르게 그것을 꼭 세어야 할 것처럼 세고 또 세어 본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미쳐 세지도 못하게 주룩주룩 빗방울이 떨어지면, 또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 넷.....ꡑ세었다. 그 빗방울은 빗물이 되어 낮은 데로 제법 출렁이며 흘러간다.

마른 하품이 연속 나오더니 사르르 졸음이 왔다. 한참 졸다가 쏟아지는 빗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무도 모르게 기쁜 소식을 나에게만 전하기나 한 것처럼 빗방울은 ‘퐁 퐁 퐁’ 포말을 만들며 나직이 속삭인다. 마당가의 한결 산뜻해진 봉숭아처럼 힘든 일이 있을 때 마음을 촉촉이 적셔 주겠다고.

장마철에 굵직하게 퍼붓는 작달비보다 가뭄에 목마른 속을 후련하게 해 주는 소나기가 더 반갑다. 봄이면 어린 움의 눈을 틔우는 부드러운 이슬비는 조용해서 좋았고, 보슬보슬 내리는 빗소리가 들판을 녹색으로 만들어 갈 때도 딸들의 재잘거리는 음성처럼 포근했다.

그렇게 감상적으로 와 닿던 빗소리도 내 생활에 따라 달라졌다. 정다운 친구인 양 반갑던 빗소리가 어느 여인의 눈물처럼 쏟아졌고, 외로울 때는 훌쩍훌쩍 우는 소리로 더욱 고독을 부추겼다. 울적한 마음에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비를 맞고 가로등 밑을 정처없이 서성거리다가, 갈 곳이 없어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 자신에게 투정을 부리며 빗물과 섞이고 나면, 영혼을 씻어주는 소독수처럼 가슴이 후련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깊어가는 가을밤 겨울을 재촉하며 쭈룩쭈룩 내리는 빗소리에 잠이 깨면,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온갖 상념에 사로잡힌다. 잠을 청하기 위해 ‘하나 둘 셋....백까지 몇 바퀴 돌고 돌며 빗소리와 함께 밤을 지샌다.

그러다 보면 시간은 졸아든다. 빗소리는 작아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사랑도 하고, 미운 사람 만나 미워도 하며, 내 마음대로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그래도 빗소리는 내 가슴만 때렸다.

방안의 가득 찬 어둠 속에서 가슴으로 잦아드는 빗소리들. 밤 내내 곤히 잠든 막내를 끌어안았다가 놓았다가 하면, 청승맞은 빗소리만 주룩주룩, 콸콸 콸콸 양철로 된 홈대에서 쏟아지며 더욱 요란을 떨어대었다.

그런 세월이 얼마간 흐른 후 지명(知命)에야 단독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아파트에서는 ‘윙윙’ 바람 소리나 우두둑 떨어지는 소낙비 소리, 빵빵거리는 자동차 크락숀 소리, 장수들이 마이크로 외치는 소리는 잘 들리지만 보통때 빗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홈대를 통해 시도 때도 없이 쪼르륵 쪼르륵 물소리가 들려도 잠못 이루는 밤은 없어졌다.

이제는 친정집의 지시락물이 포말을 일으키며 떨어지는 꿈결 같은 유년시절의 그 빗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