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이 넘은 어머니는 세탁기가 있어도 종종 세탁장 바닥에 앉아 손빨래를 하신다. 서울시청 옆으로 흐르던 개울과 청계천에 장난삼아 작은 빨래거리들을 들고 나가 놀던 기억을 떠올리고, 명주 한복을 뜯어서 섬세하게 다시 장만하던 외할머니 얘기도 하신다. 그럴 때는 영락없이 시청 계단과 덕수궁 옆 성공회 유치원에서 뛰어놀던 어린아이의 얼굴이다.

예전에는 빨래가 매우 고된 일이었다. 애벌 빨고, 양잿물에 삶고, 두들겨 빨고, 다듬이질, 풀 먹이기, 다리미질까지 끝내려면 하루해가 모자랐다. 가족이 많고 일거리가 많은 시절에 농촌 출신의 어린 소녀들이 값싼 임금을 받고 가사를 도왔다. 겨울이면 그네들의 손이 빨갛게 붓고 터서 글리세린을 끼고 살아야 했다. 그때는 고무장갑이나 더운 물조차 없었으니 고초가 얼마나 심했을까. 보통 자녀가 너덧 정도 되는 집에서 깔끔하게 옷을 입히려면 어머니의 손에는 지문이 남아나지를 않았다. 그래도 여인들의 괴로움과 슬픔은 빨래터의 대화 속에서 녹아내리고 씻어지고 흘러내려갔으며 어머니의 고된 노동을 거들면서 아이들에게는 추억이 쌓여갔다.

지금은 특급호텔로 변모했지만 홍은동 논골의 돌산 옆에는 정승집이라는 고택이 있었는데 궁궐에 버금가는 건축물과 드넓은 정원은 신비에 싸여 있었다.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울타리 안에는 능이 있고 아름드리 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대부분의 구역을 출입통제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물을 길어다 먹고 빨래를 하던 우물은 개방이 되어 있었다. 우물은 바위를 굴처럼 파서 두레박으로 퍼내게 하고 물이 흘러넘치는 길에는 넓적한 돌을 깔아 빨래를 할 수 있게 해놓았다. 거기서 하는 한여름 밤의 목욕은 여자들의 특권이었다.

어느 해 여름 밤인가 목욕을 하러 갔던 사촌 언니가 허겁지겁 집으로 들어오며 우물 속에 보석이 빠져있다고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방학이라 함께 모여 있던 대여섯 명의 남녀 사촌들이 성냥과 초를 들고 빨래터로 달려갔다. 과연 우물 속에는 영롱한 보석이 빛나고 있었다. 그걸 건지겠다고 두레박으로 물을 퍼내며 온몸을 적시던 보석 탐험대는 자신들의 수선스러움 때문에 자리를 떠서 날아가는 반딧불이를 망연히 바라보아야 했다. 그날 비록 보석을 건지지는 못했지만 반딧불이는 우리 마음속에서 빛나는 보석이 되었다.

‘뚜뚜’ 하는 세탁 종료 벨 소리와 함께 어린 시절 빨래터에서 잃어버린 손수건이 보인다. 손수건은 시간의 바다로 쏜살같이 달려가고 40년 전으로 거슬러올라갔던 나는 손수건을 잡지 못한 채 물길을 따라 내려온다.

그 시절의 무명 빨래감은 까만 겨비누로도 때가 순하게 빠지고 독한 양잿물과 방망이질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요즈음의 결 고운 옷감들은 울샴푸로 살살 달래서 빨아야 한다. 옷감은 그렇다치고 걸핏하면 올이 잘 나가고 고농축 세제로도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얼룩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희노애락을 풀어내던 논골의 빨래터가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