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한림원은 200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오스트리아의 여류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를 낙점하고, 그녀가 ‘소설과 시를 통해 사회의 진부함과 모순을 드러내는 독특한 언어적 열의를 보여 주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국내 독자들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작가는 누구인가?

연전에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피아니스트」와 나란히 국내에 개봉되었던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동명 영화를 기억하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바로 이 영화,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과 남녀 주연상을 석권했던 「피아니스트」의 원작(『피아노 치는 여자』)자이다.

옐리네크의 대표작인 『피아노 치는 여자』는 어머니의 강압으로 뒤틀린 성적 욕망을 갖게 된 피아노 선생 에리카와, 그런 그녀에게 호기심을 느낀 제자 클레머의 어긋난 사랑을 그린 소설이다. 피아니스트로서 성공하는 것 이외에 일체의 다른 욕망을 갖는 것을 금지당한 채 어머니의 과도한 집착과 감시 아래 성장한 에리카는 사랑할 줄도, 사랑받을 줄도 모르는 정신적 불구자이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했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음악원의 피아노 선생으로 나이 들어가는 그녀는 정신병으로 죽은 아버지를 대신하는 ‘남성’이자 ‘가장’으로서 도착된 모녀 관계의 고치 속에서 숨 막히는 일상을 이어간다. 당연히 억눌릴 대로 억눌린 그녀의 욕망은 시시때때 분출을 열망하지만, 그것은 제자들을 모욕하거나 무고한 타인을 가해하거나 면도칼로 자기 몸을 훼손하는 등의 가학과 파괴로 표출될 뿐이다.

나이 어린 제자의 집요한 구애 앞에서 그녀의 굴절된 여성성은 자연스럽게 피어나기를 거부한다. 철저하고 완벽하게 사랑에 복속되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 사랑이라는 권력에 매몰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녀의 분열된 자아는 클레머에게 마조히즘적 욕망으로 가득 찬 편지를 보내 복종의 형태를 스스로 지정함으로써 허약한 내면의 실상을 은폐하고자 한다. 이에 남성으로서의 자부심에 상처를 입고 모욕감을 느낀 클레머는 그녀가 편지에서 요구한 바의 무자비한 가학 행위 끝에 그녀를 강간하고, 편지에 쓴 것과는 달리 내심 따뜻한 사랑을 갈구했던 에리카는 복수의 칼을 들고 클레머를 찾아 나선다.

『피아노 치는 여자』는 내용의 상당 부분이 작가의 개인사와 중첩되는 자전적 소설이면서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작품 세계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 주는 문제작이다. 1946년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마르크 주 뮈르츠추슬라크에서 체코 출신의 유대 계 과학자인 아버지와 비엔나 귀족 가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피아노와 오르간, 리코더 등의 기악 및 작곡을 공부했다(소설에서처럼 그녀의 아버지 역시 정신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명문 빈 국립 음대와 빈 대학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전공하고 연극학과 미술사를 공부한 그녀가 음악을 떠나 문학으로 선회한 것은 그녀를 피아니스트로 성공시키고자 하는 어머니의 스파르타식 훈육에 대한 반발 때문이었다고 한다.

1967년 첫 시집 『리자의 그림자』를 출간하면서 문학 활동을 시작한 이래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정치, 사회적 부조리와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세속적, 권력 지향적 성향을 통렬히 비판하고, 나아가 파괴적 성 묘사로 남성주의의 해체를 시도하는 페미니즘적 작품들을 꾸준히 발표해 왔다. 기존 사회 체제의 위선과 비리를 고발하는 데 자신의 문학적 본령을 두고 있는 그녀는 여성적이고 우아한 글쓰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들은 다분히 위악(僞惡)적이며, 괴테, 실러 등 고전주의 대가들의 언어를 희화화한 수많은 인용 덕분에 또한 대단히 난해하다는 평을 듣는다.

그녀의 도전적 글쓰기를 불쾌해하는 남성 작가들로부터 포르노라는 공격을 당하기도 했던 그녀의 작품들은 그 좌파적 성향으로 인해 자국에서보다는 독일에서 먼저 인정받았으며, 하인리히 뵐 상, 페터 바이스 상, 게오르그 뷔히너 상, 레싱 상, 하인리히 하이네 상 등을 수상했다.
『우리들은 미끼새들이다』, 『미하엘』, 『연인들』, 『피아노 치는 여자』, 『욕망』, 『죽은 자의 아이들』, 『잡담 소설』 등의 소설과 희곡 『클라라 S 음악 희극』, 『질병 혹은 현대 여성들』 등의 작품이 있으며, 이 가운데 『피아노 치는 여자』(문학동네)와 방송극 「노라가 남편을 떠난 후 일어난 일 또는 사회의 지주(支柱)」(『독일현대희곡선』, 성균관대 출판부)가 국내에 소개되었다.
17세 여고생 친구들의 시각으로 경직된 사회 구조 속에서 몰락해가는 처녀들의 이야기를 그린 『연인들』과 관광객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는 스키리조트를 배경으로 섹스밖에 모르는 남편에게 시달리다 못해 집을 나와 방황하는 여주인공 게르타의 이야기를 그린 『욕망』이 조만간 번역, 출간될 전망이다. 1974년 오스트리아 공산당에 입당했다가 1991년 탈당한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1974년 정보과학 전문가인 고트프리트 휜스베르크와 결혼하여 현재 빈에서 살고 있다.

황영옥 : 월간『Booksetong』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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