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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십 년 동안 저술에 공을 들여 ‘임원십육지’ 백여 권을 최근에야 겨우 끝마쳤다. 그러나 책을 맡아 보관할 자식도 아내도 없으니 한스럽다. 우연히 웅집역(熊執易)의 사연을 보고 나니 구슬퍼져 한참 동안 눈물이 흘러내린다.”

정조 순조 연간의 학자 서유구가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란 책의 한 곳에 쓴 낙서 같은 글의 한 대목이다. ‘임원십육지’라면 조선 후기 실학을 대표하는 방대한 저술이다. 이러한 기념비적 저서를 편찬하고 난 기쁨에 앞서 오히려 그 보관과 전승을 걱정하는 서유구의 슬픔이 짤막한 글에서 묻어나온다.

그가 보고서 눈물을 쏟은 웅집역의 사연은 ‘당국사보(唐國史補)’에 실린 다음 이야기다. “웅집역이 경서의 내용을 분류하여 ‘화통(化統)’ 500권을 저술하였는데 저술에만 40년이 걸렸다. 임금에게 올리기 전에 그는 서천에서 죽었고, 무원형이 그 저술을 베껴 임금에게 올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혹시 책을 잃어버릴까 염려한 그 아내 설씨가 내놓지 않아서 지금까지 그 집에 보관되어 있다.”

필생의 노력이 담긴 저서를 지키려는 아내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 그 ‘화통’은 지금은 종적이 묘연하다. 하지만 서유구는 남편의 책을 지키려는 그 아내의 정성을 부러워하는 한편, 차라리 그때 친구에게 빌려주었더라면 후세에 전해졌을지도 모른다고 기대한다.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니 아내는 오래전에 죽었고, 아들마저 저술 막바지에 죽었다. 누가 30년 적공(積功)의 저서를 간행하거나 후세에 전하려 하겠는가? 서유구의 하염없는 눈물이 당연하지 않은가?

자기 저서에 대한 애착은 누구를 가릴 것이 없다. 하지만 서유구는 ‘임원십육지’에 대한 남다른 애착이 없을 수 없다. 1805년 노론 벽파에 대한 정계 축출의 여파로 서유구는 조정으로부터 완전히 축출되어 18년 세월을 야인으로 보내게 된다. “병인년 나는 시골로 쫓겨나 망가져 떠도는 신세가 되었다. 하루에도 세 번씩 죽기를 기도하여 스무 해 동안 그쳐본 적이 없었으나 지금껏 죽지 못한 것은 아들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토로할 만큼 고통스런 시절이었다. 고통을 잊기 위하여 그는 수많은 자료를 모아 정리하여 이 책을 저술하였고, 완성을 보는 데 30년 세월이 걸렸다. 이렇게 죽음의 유혹 속에서도 저술할 수 있었던 데에는 동생과 아들의 도움이 컸다. 특히, 그의 외아들 우보가 편찬을 도왔다. 그런 아들이 1827년 33세에 요절하는 고통이 겹친다. 그는 제문을 지어 이렇게 울부짖는다.

“나는 근래 심히 노쇠하여 눈곱이 끼고 정신이 흐려 더 이상 책을 읽고 붓을 들지 못했다. 그래서 빠진 것을 보완하고 번잡한 것을 덜어내는 일에 자주 네 힘을 빌렸다. 격두(格頭)와 오사란(烏絲欄) 사이의 숱한 글자들은 네가 남긴 흔적이건만 너는 어디 가고 책만 홀로 상자에 남았단 말이냐? 아아! 내가 무슨 마음으로 다시 들여다보겠으며, 내가 무슨 심정으로 편찬을 계속하겠느냐?”

저자의 고통과 눈물이 배어 있는 이 방대한 저술은 요행히도 염려와는 달리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많은 저술은 장서와 함께 세상 곳곳에 흩어졌다. 10여년 전 나는 이 책의 일부를 번역하면서 저자의 손때가 묻어 있는 원본이 보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최근에야 지인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 소장된 그 원본의 복사본을 입수하여 해묵은 염원을 풀 수 있었다. 격두와 오사란 사이에 지우고 고치고 보충한 흔적이 낭자한 것은 아마도 그가 애통해 마지않던 아들 우보의 흔적이리라. 그가 앞에 두고 눈물을 흘린 책이 분명하다. 숙연한 마음 금할 수 없으니 흩어진 원본을 수집하고 정리하여 번듯하게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 안대회·영남대 한문교육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