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숲, 고전의 바다/조선일보 / 2004.3.19 (금)

어둠 속의 휘파람

1970년대는 일사분란함 그 자체였다. 그 속에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그해 봄은 조금 추웠던가, 그래도 개나리와 진달래가 곳곳에서 망울을 터뜨렸다. 한반도의 도시와 촌락마다 새마을 노래에 맞춰 시민들이 재건체조로 아침을 시작했다. 다방의 음악소리는 악을 썼고 손님들은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신문에는 매일 수배된 사람의 사진이 실렸으며, 거리에 깔린 전경의 눈은 번득였다. ‘자유’라고 발음하면 불온의 혐의가 씌워졌다.

캠퍼스는 숨죽였다. 학생들은 아침마다 조용히 광장에 모여들었다. 교수들은 텅 빈 강의실에서 니체와 하이데거를 말했다. 광장에서 딱히 할 말이 없는 학생들은 그냥 노래로 침묵을 채웠고, 노래 끝에 묻어나는 갈망을 나눴다. 노래 끝은 행렬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대열 앞에 있던 자들은 다음 날 나타나지 못했다. 대열을 전경이 가로막았다. 그들은 해가 질 때까지 캠퍼스를 게릴라처럼 돌아다녔다. 어둠이 내리면 빈 강의실을 찾아 숨을 돌렸다. 갈망이 조금씩 구체화될수록, 남은 자들에게는 망명지가 필요했다.

김수영(金洙暎)은 남은 자들의 아지트였다. 김수영은 1970년대 청년들에게 분노의 방식을, 자유를 갈망하고 갈무리하는 절제의 방식을 보여주었다. “나무여 영혼이여/ 가벼운 참새같이 나는 잠시 너의/ 흉하지 않은 가지 위에 피곤한 몸을 앉힌다…/ 나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는 시대에 살지만/ 이 시대는 아직도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는 밤이다”(김수영·‘序詩’). 1970년대는 ‘용서할 수 없는 것’들과 타협을 요구하는 절박한 마음 사이에서 줄넘기를 했다. 타협할 수 없는 자들은 거친 현실 속으로 뛰어들었다. 남은 사람들은 부엉이처럼 서러워했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 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거미’).

연희전문 영문과 출신의 김수영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석방되었을 때 그가 터득했던 설움은 70년대 청년들이 앓던 것을 넘어서고 있었다. 거제도에 대한 한 줄기의 회한도 허용하지 않으며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갇힌 공간 속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그래도, 김수영의 내면에는 어둠이 내린다. “3월도 되기 전에/ 그의 내부에서는 더운 물이 없어지고/ 어둠이 들어 앉는다”(‘수온계’). 그럴수록, ‘줄넘기 작란(作亂)’ 같은 현실에서 자유를 향해 의식이 반란을 일으킨다. 의식의 반란을 통해 나와 세상을, 세상을 참지 못하는 나를, 그런 나를 일상적으로 배신하는 자의식을 바로 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의식을 가두는 바리케이드 앞에서 1970년대의 청년들은 쩔쩔맸다. 그의 난해한 시세계에 난무하는 거친 말들이 어두운 세상과 대면하는 방식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을 때, 유신(維新)이 무너지고 ‘서울의 봄’이 오고 급기야 광주사태가 다시 청년들을 무장해제했다. 또 견뎌야 했다. 반란의 아지트에서는 자유와 비애를 갈무리한 헬리콥터가 날았다. “헬리콥터가 풍선보다도 가벼웁게 상승하는 것을 보고/ 놀랄 수 있는 사람은 설움을 아는 사람이지만/ 또한 이것을 보고 놀라지 않는 것도 설움을 아는 사람일 것이다”(‘헬리콥터’).

지금은 훌쩍 늙어 장년이 된 그들은 설움의 침전물이 비장한 절제의 방식임을 확인하면서 70년대를 그렇게 건너왔다. 휘파람을 부는 심정으로. 가벼운 걸음의 휘파람이 아니라, 어눌해진 마음을 달래려는 슬픈 전략, 절제를 위한 가락이었다. 김수영이 앞장서 그런 인식의 물꼬를 텄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해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푸른 하늘을’). 노고지리의 자유는 단단한 고독을 요구하고, 자유 뒤에 오는 또 다른 반란까지를 견뎌야 함을 가르쳤다. 주체의 끝없는 견인력이 없다면 자유로의 이행은 헛것이 된다. 그래서, 김수영의 주체는 풀처럼 자유로워지고 싶다. 누구나 한번 닻을 내리고 싶은 정신의 세계―김수영의 ‘풀’은 유연한 의식의 양식이었다.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풀’). 바람이 불면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 웃는다. 그것이 자유이고, 자유로의 이행이다. 사람들은 어두운 골목길을 걸으면서 휘파람을 분다. 고독과 공포가 물러가고 자유의 희미한 그림자가 비칠까, 김수영은 70년대를 건너는 그들에게는 어둠 속의 휘파람이었다.

(송호근·서울대 사회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