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늘이 갓이 보이도록 개고 물은 바닥이 집힐 듯이 맑았다. 바람도 없이 차가운 기운이 싸도는 아침, 매일같이 이 아침도 서릿발이 희다.

- 인젠 날씨가 부쩍 차져갈 모양이다.

- 서울의 가을은 짧다.

동행이 있었더면 아마 이런 말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버드나무 잎이 한결 늙어져 보이고 들빛도 도시 생기가 풀리어 있다. 이렁저렁 나선 걸음을 나룻가 모래 언덕 위에 멈추었다.

돛단배가 내려간다.

돛 없는 배도 내려온다.

뗏목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강 건너로 나지막하게 금을 두른 산, 이미 누런 빛조차 가시고 잿빛으로 낡아져가는 들, 나무, 집, 연기, 그러나 여기는 별장 지대는 아니다. 장안의 값싼 놀이꾼들이 한때 배급빵 나부랭이나 싸가지고 와서 놀다가 가는, 그리고는 내년 철이 올 때까지 내버려지는 그런 허름한 놀이터이다.

이곳 관리자는 누구일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전에 법률을 배웠던 소치일까. 세상에 임자(소유자) 없는 것은 공산의 명월뿐이라고 법률선생은 가르쳐주었다. 남의 터 위에다가 지은 집은 헐어내야만 하고 남의 나무를 베어다가 기둥을 세우면 도둑으로 몰려 징역을 살아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땅이 먼저 있었지 사람이 먼저 생겼나.

어디 누가 낭굴 늘어놓았나 하느님이 키워주신 거지.

이런 법을 배우기 이전, 법률 이전 어렸을 때 말다툼에 쓰이던 '말'이 또 생각 위에 떠오른다. 근처에는 요전번까지 볼 수 없었던 자그마한 집 하나가 서 있다. 반쯤은 땅을 파서 … 하여간 사람이 들어서 사는 집이 하나가 있다.

전재민(戰災民)의 집 ? 그것을 타당한 추측으로서 나는 가볍게 용인했다. 이만큼 떨어진 곳에 이만한 터를 골라서 집을 짓는다면 관리자나 당국에서도 당분간 시비는 안 하겠지.

2

집 근처로 개간될 열 평 남짓의 경지가 있다. 그리하여 시방 한 중년 남자가 들어 괭이를 대고 있다. 그것을 고르고 있는 것이다.

사관학교를 나왔으면 육군 준장까지는 승진을 했음직하다! 정말 잘 발육된 체격이다. 그는 상투를 매고 수염을 부얼부얼하게 길렀다. 보매 산악지 출신일 것 같으면서 궁하게 맺힌 데가 조금도 없다. 들었다 놓는 괭이 바람이 보는 눈에는 마치 장난과도 같다.

"무얼 심으시렵니까?"

나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나지막한 음성으로 공손히 물었다. …일순, …또 한 순간 …이런 경우에 심상히 기대되는 가벼운 대꾸가 지연이 되자 나는 심리(心裏)에 다소 무안을 느꼈다.

내 말이 아니 들렸을 리는 없겠는데…. 남의 물음을 듣고도 대답을 안 하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겠다.

내 태도에 어디 아니꼬운 데가 있었음일까.

내말이 너무 공소(空疎)하여 그러할까.

물론 그의 소위는 보건을 위한 체련은 아니겠다. 한지 이용의 후생 작업도 아닐 게다. 연극이 아닐 건 더 말할 것도 없다. 대답은 이내 없고 말았다. 나는 불유쾌한 생각을 의혹으로 돌려보았다.

아까의 추측을 확대하여 본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는 하숙에만도 그만한 사유가 따른다. 이 동리에서 저 부락으로 옮기는 이사에도 상당한 수고와 타산이 고려된다. 추측과 같아서 이북에서 온 이라면 삼팔월경(三八越境)이라 난관에 필적할 무슨 곡절이 있음직한 일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의 심중에는 단순한 호의에 동화할 수 없는 무엇이 있을 것도 같다. 한가를 얻어 만보(漫步)하는 이의 말벗으로 잠시나마 소비하기를 거부하는 심정에서였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다시 이 한때를 자가소업(自家所業)에 열중하였기 때문에 내 말이 혹 그의 귓가를 스쳐버렸을 것으로도 짐작은 된다. 그런 관점에서 나는 처음 이 정경에다가 다소의 상상을 보태서 그 제목을 "허실(虛實)"이라고 붙여보았다. 남의 갈채와 관심을 도외(度外)에 두고 제 일에 여념이 없는 사람 - 그것은 '위대한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위대한 나팔을 부는' 당세 유풍(當世 流風)에 한 대조로 느낀 때문이다. 대꾸가 있었다 하자. 그건 다듬도 깍지도 않은 말이었을 게다. 미려하고 유창한 시행용어(時行用語)에 비기는 의미에서도 나는 그런 제목을 가릴 뻔하였다.

3

그곳을 비켜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나는 또 이 정경 앞에서 멈추었다. 잘게 친 고랑에다가 이번에는 무슨 씨앗을 놓아가는 모양이다. 양재기에 담긴 것을 한 줌씩 쥐어 주룩주룩 뿌려가고 있다.

보리? 밀? 혹은 시금치 같으 거나…아무런 거나 시방은 벌써 좀 철이 지난 성 싶은데….

가장 좋은 조건 밑에서도 씨를 뿌리는 마음에는 항시 불안이 뒤섞인다. 딱딱한 씨알이 부실부실한 땅에 떨어져서 묻힐 때와 조심스럼… 그것은 씨앗을 뿌려본 사람만이 안다. 그런 불안 속에서 땅은 수태(受胎)되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이요, 기적을 믿는 마음 이다.

이제 모래, 흙 반반으로 거름기 없는 보얀 바닥에 씨앗을 놓는건 어떠한가. 정작 농사꾼들은 그런 걸 우습게 안다. 순박한 시골 농사꾼들은 그걸 죄로 가는 일이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웃을 수만도 없는 경우가 아닌가. 또 화전 같은 바닥이나 넓은 데라면 한 알이 떨어져서 서너 알씩만 붙어도 다소 희망은 걸어둘 수 있겠지만 불과 요까짓 바닥에서야… 이렇게도 생각이 미친다.

- 저렇게 살려면 아무 데선 못 사나.

앞으로 긴긴 겨울이 가로놓여 있다. 그리고 봄 - 보리 이삭을 잘라먹는 건 하지 망종(夏至 芒種)도 지나서가 아닌가. 그러다가는 이렇게도 생각해본다. 그이는 내년도 내후년도 아마 별 재앙만 없고 보면 십 년 후까지도 살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간을 이어가는 길을 그치지 않을 것 아닌가.

염세(厭世) - 그건 쉬이 있을 수 없는 일로 짐작된다.

실행(失行) - 그것도 있지 말아야 할 일이다.

하여튼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도록 마련인가.

하지만 또 생존은 타성과 예정과 계획에만 의존하지 아니하고 때로는 불가항적 외력에 마치 큰길을 건너가는 개미의 행렬이 다가가는 차륜의 거센 힘에 눌리어서 먼지 속에 묻혀버리기도 하는 그런 정상(情狀)을 또 안중에 넣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이런 것은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고 시방 흙을 모아 씨앗을 가리며 있는 그이의 심정은 훨씬 단순하고 생생한 것일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1947.11.23)

김홍섭 <1915-1965>

전북 김제출생. 1940년 조선변호사시험 합격. 1946년 서울지법판사. 1950년 서울고법판사. 1953년 서울지법 부장판사. 1960년 대법원판사. 1964년 서울 고등법원장

1954년 시집<無名>. 수필집 <創世紀抄> 출판. 1960년 <無常을 넘어서>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