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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변영희 |
날짜 : 16-12-02 10:22
조회 :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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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는 세상/사람/사물, 변하지 못한 하드웨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세상을 살고 관찰하면서 가장 놀랍다고 느끼는 것은 눈송이처럼 하염없이 쏟아지는 정보, 기상천외한 전자기기와 디지털 발명품, 급변하는 유행 코드(패션, 음식, 담론, 취미)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일상생활에서 빠르게 흡수하고 활용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능력이다. 당황스럽다고 하면서도 모든 것은 이미 일상에 안착해 있다.
마음에 드는 펜을 골라 노트에 적는 대신 핸드폰 자판을 두드려 메모장에 기록하고 이메일로 전송하는 일은 이미 일상이 되었다. 종이 대신 태블릿 PC 스크린을 롤링하며 원고를 고치고 읽고 수정하는 작업도 익숙한 풍경이다. 갑자기 일이 생기면 스마트폰으로 기차표를 검색하고 기기에 저장된 카드로 할부 결제해서 경제적, 심리적 부담을 줄이는 조삼모사를 기획하는 일도 종종 있다(나눠 내든 한꺼번에 내든 결국은 다 내 계좌에서 나가는 것을).
사람들의 능력은 생각보다 월등하다. 생각해 보면, 변하는 세상을 만든 것도 사람이고, 불평을 하면서도 호기심을 가지고 빠르게 적응하는 것도 사람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구태의연한 시스템, 즉 제도 뿐이다(변하지 않아서 좋은 제도도 물론 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같은 것을 바라보는 시선 차이도 있을 수 있겠다).
잡학, 집단 감성, 대중 지성의 뿌리
그렇다면 언제부터 사람들은 이런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까.
변하는 세상에 대한 사람들의 적응력과 눈부신 변용, 창조적인 운영 능력은 비단 디지털 시대의 것만은 아니다. 한국 고소설을 보면 옛날 사람들이 한글로 얼마나 많은 양의 정보와 지식, 문화와 관습, 생각과 감성을 수용하고 섭렵하며 즐겨왔는지를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한글은 지식인의 문자가 아니라 서민의 문자다(고전적 표현으로는 ‘백성의 문자’). 한글로 아무리 글을 잘 써도 과거에 급제할 수 없고, 관리가 되어 요직에 올라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수도 없었다. 말하자면 한글은 주류 제도권에 진입하는 유력한 문화자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사람들은 한글로 놀라운 질량의 정보와 지식, 문화와 감성을 향유했다. 그것이 바로 한글 소설이라는 대중 장르다. 여기에는 단지 서민과 여성의 문화와 생각만이 아니라, 상층, 지식인, 왕, 해외 문화,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하류 인생이 망라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조선시대 한글 소설은 잡학적 지식의 총체였다.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지식 체계를 담되, 철저히 대중의 눈높이에 맞게 변형해서 수용했다. 고급 관리가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에서부터 선비가 쓴 정형시와 천민의 욕설, 시정에서 부르던 노래 등이 모두 포함된다. 배척받았기에 오히려 윤리적이었고, 집단 감성을 통해 공감대를 이어 갔다. 이 모든 것이 한글로 적혔다.
소설이라는 장르 자체가 잡학의 결과물이고, 순한글로 적혔다는 것은 중요하다. 조선시대 대중이 지닌 확장적이고 포용적 역량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구나 순한글 소설은 조선시대에 ‘문(文)’의 범주에 들지 않았던 천한 장르였다(조선시대 지식인에게 혹독한 비판을 받았던 장르였지만, 그러한 비판의 정황은 역설적으로 지식인이 소설을 읽고 즐겼음을 입증한다. 이는 오늘날의 대중문화,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과 드라마를 대하는 이중적 태도와 흡사하다).
조선시대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 단지 소설만을 연구해서는 안 되며, 상층과 하층, 조선시대라는 시스템 전체, 동아시아와 세계정세, 그 역사까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바꾸어 말하면 대중, 민중, 서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중이라는 집합체가 담고 있는 다층적 정보와 경험의 양, 복합적 시선과 판단의 결을 섬세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대중지성의 출현이 단지 현대적인 현상만은 아니다. 그것은 이미 역사화되었기 때문에, 현대인이 일상 속에서 최근의 경험과 접속해 충분히 운용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 개개인의 사회적 경험과 역사 자체가 빅 데이터다. 디지털 정보화 시대의 대중지성은 그것을 선별해 모으고 비교해서, 최선의 선택과 판단을 하는 법을 이미 몸으로 익혔다.
정치적 상상력의 빈곤
세상은 빠르게 변해 가고, 그 변화를 이끌어낸 사람들의 능력은 무한히 진화한데 비해, 정치적 상상력은 더없이 빈곤하다. 권력은 잡고 지키고 누리는 것이라는 정치적 상상력은 명백히 시대착오적이다. 사람들은 이미 세상의 변화를 끌어내며 더 멀리 앞을 내다보고 있는데, 낡은 방식으로 그에 대응하려는 여러 현상을 지켜보는 것은 답답한 일이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보고 있다. 보여주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아야 할 것을 스스로 탐구하고 선택해서 본다. 속고 속이는 게임에서 결코 지지 않으려는 승부욕도 있다. 너른 마음으로 일러주고 다독이며 기다리는 포용력과 지혜도 가지고 있다. 대중 지성이기에 다초점이고, 집단 감성으로 움직이기에 감추려고 만든 사각지대뿐만 아니라 미처 감추지 못한 무의식과 내면까지도 읽어낼 수 있다. 침묵하는 눈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하나하나 생각을 가지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무리를 이루었을 때, 그것은 낱낱의 용의 비늘처럼 물결치며 역동하고 있다. 집단 감성과 대중 지성의 목소리를 경청해야 하는 것은 이제 예의나 참조 사항이 아니라 필수적이고 긴급한 의무다.
용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용의 비늘이 용이다.
- 출처 - 실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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