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대한 수필 4
멀리 소호헌을 바라보며
류인혜
유홍준 님이 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3권에서 북부 경북 의성 안동지방 이야기를 읽었다. 그의 경북지방의 생활문화에 대한 충분한 납득은 대구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결과이겠지만 날카로운 시선은 경상도 사람들의 내면까지를 뚫어 본다. 나타나 보이는 문화유산들의 배후에 숨어 있는 경상도의 기질에 대해서 먼저 이해를 하고 있다.
현대에 사는 이들이 납득하기 어려운 안동의 양반문화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으로 모든 난해함을 쉽게 이야기하고 있어서 무척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 긍정적인 따스함이 나의 내면에 숨어 있던 어떤 부분을 일으켜 세웠다. 그 책에서는 안동 양반 문화의 시작을 소호리에서부터 얘기한다.
- 의성군과 안동시의 경계선을 넘으면 우리는 곧 오른쪽으로 고색창연한 기와집이 늘어선 양반 마을을 만나게 된다. 여기는 망호리(望湖里), 한산 이씨, 달성 서씨, 영양 남씨의 동성(同姓)마을이 있다. 예서부터가 옳게 안동 답사다. 안동 사람들은 이곳을 망호리라고 부르지 않고 그냥 소호(蘇湖)라고 하는데 그것은 안망실(安望實)과 소호를 통합하면서 만든 망호라는 아직 익숙지 않기도 하거니와 소호헌(蔬湖軒)이 하도 유명해서 그렇게 입에 붙은 것이다.
나는 안동군 일직면 망호리의 한산 이씨 해산공파 대산 종가로 시집을 갔다. 결혼식 며칠 후 시댁으로 내려갔는데 대구를 거쳐서 들어갔기에 밤이 늦어서야 시댁에 도착했다. 마을에 들어서자 산 밑의 어둠 저쪽에 우뚝 서있는 커다란 건물이 눈에 들어와 숨을 죽였다. 거대한 무엇이 전신을 휘감는 듯해서 남편 옆에 바짝 붙어서 겨우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예수 믿는 손녀를 종가로 시집보낸 할머니께서는 '그저 시댁의 법도대로 따라야 한다.'는 말씀밖에 더 말이 없으셨다. 시키는 대로 '봉제사(奉祭祀)접빈객(接賓客)'이란 말만 머릿속에 넣고 묵묵히 지냈다. 다행히 주일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은 허락해 주셨다. 그런데 예배 중에도 손님이 오셨다는 전갈이 오면 슬그머니 일어나 집으로 가서 술상이든, 밥상이든 차려내어야만 되었다.
어른들이 계시지 않으면 큰 아이와 함께 사랑마루에 올라앉아 멀리 신작로로 지나가는 차들을 보았다. 그리고 건너편 음지마의 서씨 댁의 낡은 지붕을 바라보곤 하였다. 소호헌은 서씨 댁의 사랑채다. 유명한 문화재가 바로 건너편에 있었지만 마을 출입이 제한된 새댁에게는 먼 곳에 있는 침묵이었다.
유홍준은 대산 종가가 있는 양지마를 음지마라고 소개했다.
- 소호헌 건너편에는 목은 이색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한산 이씨 동성 마을이 있다. 개천 하나를 두고 노론과 남인 마을로 갈라서 있다. 이 마을은 안망실로 들어가는 남쪽의 산자락에 있어서 음지마라고 부르는데 영조 때 대산(大山) 이상정(李象精 1710-81)이라는 큰 학자가 나와 안동의 명문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대산 할아버지는 우리 집 불천위시다. 그분의 그늘 밑에 있는 후손들이 갖는 긍지는 대단하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할머니의 말씀대로 시댁의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보기에는 내면에서 솟구치는 것이 너무 많은 젊은 새댁이었다. 죽은 조상을 섬기는 일에 너무 치중하여 살아 있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눌려 있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수없이 드나드는 손님들의 접대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제사상을 차려내기 위해 들어가는 경제적, 시간적인 모든 수고가 낭비라는 생각을 단순히 기독교인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대산 할아버지 내외분의 기제사는 모두 음력 섣달에 일주일 사이로 들어 있어, 두 번의 큰제사를 모시려고 한 달 전부터 준비를 해야 되었다. 그 사이에 다른 분의 기제사 삼위가 포함되어 가히 공포의 섣달이었다.
그곳에서 3년을 살고 난 어느 날 시아버님 앞에 무릎을 꿇어앉았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나가 살아야겠으니 허락해 달라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무 놀라선지 아무 말도 않으시더니 나가 있으라고 하셨다. 그리고 몇 달 후 쫓겨나다시피 서울로 이사를 했다.
얼마 전 우리 대신 종손으로 입적된 작은댁 맏아들인 종손이 대산 할아버지의 학술논문 발표대회가 있다는 연락을 보냈다. 함께 동봉한「高山書院」지에 우리 가족이 지내던 종택(宗宅)과 집 옆에 있던 사당(祠堂)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조상을 모른다 하고 떠나온 사람이 되어 늘 마음속에 죄스러움을 감추고 있었는데 새로운 종손이 든든하니 이제는 홀가분하다.
유홍준 님의 책에서도 제사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었지만 안동 양반 문화는 곧 제사문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집안에서 어느 사람이 행세를 한다는 것은 제사를 지낼 때 그의 말이 얼마나 권위가 있느냐에 따르는 것이다. 헛기침을 몇 번하면서 점잖게 하는 한 마디가 그 제사의 성격을 좌지우지하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종부가 될 사람에게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서약을 받아서 혼인을 시킨다는 이야기도 있다. 만약 내가 예수를 믿지 않는 가정에서 자라났다면 쉽게 그곳을 빠져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그곳에서 고단한 세월을 보내며 가끔 사랑에 서서 건너편 소호헌의 낡은 지붕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소호헌은 내 마음속에 있는 양반에 대한 허상이다. 그렇게 낡아서 허물이 내리는 것이다. 고루한 의식 속에서만 양반임을 포기한 것이 얼마나 잘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깊숙이 숨겨있는 선비의식은 감출 수 없는 내면이다.
안동의 양반들은 벼슬보다도 학문과 인격의 완성이 더 중요하다는 학자적 긍지, 선비의 높은 도덕률로 양반의 체통을 지켜왔다고 유홍준은 책에서 대변한다.
이 시대가 바라는 진정한 양반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왔다. 아니, 양반이란 말 자체의 허망함에서 깨어나야 된다고 믿고 싶다. 박지원의 「양반전」에서 읽히듯 모든 이들의 양반에 대한 갈망과 양반을 지키기 위한 허세에서 벗어나야지 우리 민족이 진정한 세계화를 실현시킬 수 있다.
인간은 각자의 고유한 인격을 지녀 그 속에서 스스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다. 그 인간다운 품성은 진정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달아야 한다. 성령의 은혜가 이것을 알게 할 것이다.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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