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이야기 - 꿈을 주는 나무
류인혜
나무는 높이 자란다. 하늘을 향해 올라간다.
김흥호 님의 <나무>를 다시 읽어보면 글이 이렇게 시작된다.
-언제나 하늘을 쳐다보면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하고 있는 나무,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자연을 상대하지 않고 하늘을 상대하는 나무, 내가 없는 나무, 나무는 언제나 영원한 생명을 호흡하고 있다.
나는 나무가 사람과 더불어 살면서 사람을 닮아간다고 생각을 하는데, 나무는 사람도 자연도 상대하지 않고 하늘을 상대한다는 말에 당황한다. 서둘러 하늘을 상대하는 나무의 이미지를 찾다가 문득 미루나무를 생각했다. 미루나무는 키가 늘씬하게 크다. 줄기 하나를 꼿꼿이 세워 하늘로 높이 자라난다.
미루나무에 대한 이야기를 쓸 때마다 글 이름 표기에서 늘 망설이게 된다.
어릴 적에는 그 나무를 포푸라 라고 불렀다. 그리고 한 동안은 미류 나무라고 표기를 해서 뭔가 낭만적인 분위기를 느꼈는데, 어느 날부터 미루라고 표기한다고 했다. 무엇 때문인지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나무의 이름을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나무에 대한 생각 때문이다.
고향의 가로수는 거의 미루나무였다.
외국그림에서 길 양편으로 줄을 지어선 미루나무의 광경을 보았는데, 멀고 가까운 원근법을 지켜 나란히 서 있는 그 나무의 시원한 뻗음이 너무 좋아서 실제의 나무들도 친근해졌다.
거의 한 두시간을 걸어서 이웃 마을을 방문했던 그 때는 미루나무 가로수를 따라 한 그루씩 짚어가며 걷는 지루함을 달래었다. 특히 여름날의 무더위 속에서는 나무와 그 다음에 서있는 나무그림자까지 가는 사이가 얼마나 길게 여겨졌는지 모른다. 길도 하얗게 바래는 햇살을 피해 얼른 뛰어가 그늘에 숨고는 했다. 걸어야 할 길의 거리가 빨리 줄어들은 듯한 재미였다.
봄이 되어 가지에서 잎이 돋아날 때, 아련히 안개처럼 가지에 번지는 연두 빛이 너무 좋아서 멀리까지 미루나무가 서있는 길이 잘 보이는 곳에 서서 풍경이 주는 아련함에 젖어있었다. 그리고 자라난 잎사귀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광경이 가슴을 뛰게 해서 자주 미루나무와 눈을 마주하여 하염없이 바라보기를 즐겼다.
그것을 글로 표현하고 싶어서 쓴 것이 소설 <둘이서 나눈 이름>이다. 단순히 좋아하는 나무, 미루나무와 사과나무(과수원)를 넣고 싶어서 그 소설을 쓴 것이다.
미루나무에 대한 묘사는 단 몇 줄로 지극히 짧다.
미루나무는 색깔과 빛남에 대한 환상이라면, 소설의 배경인 과수원의 사과나무는 꿈이었다.
봄이 되어 사과나무에 꽃이 피면 과수원이 많은 읍내 주변에 안개가 서린 듯한 그 아름다운 광경에 숨이 막혔다. 그 설렘이 주는 감동으로 침묵하고, 말 대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소설에서 사과나무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저 과수원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쓴 것이다.
그 소설을 쓰던 여러 달 동안은 고통스러우면서도 행복했다. 마음 속에 있는 비밀을 들키지 않고, 바라보는 사람을 가까이서 무심히 대할 수 있는 듯한 즐거움으로 지냈다.
사람을 상대하지 않고 하늘을 상대하는 나무는 사람에게 꿈을 심어준다.
사람에게 지친 마음을 나무는 위로해 주고, 다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준다. 사람이 나무와 가까이 살면서 나무에게 얻는 것 중에서 가장 값진 보답이다.
새로 이사온 동네에는 배나무가 많다. 다가올 계절에 그 나무들이 주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기대한다. 내 유년의 꿈속에 있는 나무들을 대신하여 나이가 들어 만나는 친구에게 마음을 나누어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2001년 12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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