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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수필 2

푸른 바람의 노래

류인혜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만난 것은 1967년 늦가을이다. 같은 반이던 총회장 친구가 학교 일을 도와준 감사로 책상 속에다 슬그머니 넣어준 책이다. 제목부터 마음에 들었다. 그때 몇 달 앞으로 다가온 졸업에 대한 기대만큼 교문 밖 세상을 향한 불안으로 마음에 비장한 각오가 필요했었다.
그 후 어느 기점에 도달하면 반드시 찾아들게 되는 책이 되었다. 몇 년에 한 번씩 읽을 때마다 전혀 새로운 책을 대하는 느낌이 든다. 정신의 성장을 멈추어 버리고 열아홉의 나이로 돌아간 듯 인생에 대한 어리광이 생기며 순수해지고 여린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 니나는 조용하지만 처해진 환경에 묵묵히 순응하는 강하고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다. 불우한 환경에서 열심히 살아낸다. 새벽과 비 내리는 거리를 사랑하고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굳은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스스로를 자유롭게, 일면 방종하도록 방치해 버리지만 그것이 니나의 큰 매력이다. 그러나 자신의 주변에 항상 머물며 깊은 관심을 베풀어 주는 슈타인 박사에 대한 냉정함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면이다. 한 여자에게 향한 한 남자의 깊은 애정은 그가 죽은 후 그녀에게 배달된 우편물 속에서 들어난다. 니나는 슈타인 박사가 감당해온 길고도 깊은 아픔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그녀를 만나서부터 자신이 죽을 때까지 기록한 일기와 편지 읽는 것으로 소설은 진행이 된다.

그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소설이 주는 막막함에 사로잡혔다. 두 영혼이 만들어 내는 답답하고 우울한 어두움의 세계에서 가슴이 아파 자주 한숨을 내쉬었다. 소설속의 이야기지만 두 사람의 운명적인 교류에 큰 충격을 받았다.

슈타인 박사는 니나에 대한 연민을 통해서 자신을 이끌어 가는 방법을 배웠을 것이다. 일방적인 헌신으로 외로워 지칠 때도 있지만 조금도 낙심하지 않는다. 니나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도피시키는 일에 슈타인 박사의 도움을 청한다. 그는 자신이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위해서 위험한 일을 감행하게 된다. 자기뿐만 아니라 모든 존재를 귀히 여기는 심정을 순수하게 다독여 나간다. 너무 조용하기에 그의 진정한 모습이 들어나지 않아 이기적인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한쪽으로만 집착한 나머지 함께 살고 있는 누이에 대한 방관이 이따금 아픔이 되지만 어떤 경우에도 중심을 잃지 않는 인내심은 감동적이다.

그렇게 의식이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여자를 일방적으로 관심하는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전혀 모습을 흩뜨리지 않는 슈타인 박사는 내가 바라는 이상형이 되었다. 바람처럼 흘러 다녀도 언제나 묵묵히 돌보아주는 이성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된 것이다. 내가 어느 곳으로 떠돌다오든지 한 자리에 서서 묵묵히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기대는 하늘에 떠있는 구름의 모양을 바꾸고 싶은 생각처럼 부질없는 것이지만 무엇인가를 원하고 있는 마음 자체가 귀한 것이 아닌가.
그 점은 니나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인생의 길을 비켜가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보며 씩씩하게 걸어 나간다. 굽히거나 타협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생의 한가운데서 살아가는 용감한 사람들이다. 내가 그렇게 살기를 바라고 있으니 그 책에 대한 신뢰가 오래 계속되나 보다.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순전한 사랑이다. 그것은 느슨했던 생활을 긴장시키고 생기를 돋게 한다. 기쁨을 준다. 외롭고 막막할 때마다 『생의 한가운데』를 읽는 것은 슈타인의 끝없이 지순한 사랑을 엿보면서 새로운 기대치를 발견하기 위함이다. 거기에서 만나는 생의 우울한 고독까지도 예민한 접목이 되어 마음의 가지에 붙어온다. 영혼의 움직임이 거침없이 자라나 커다란 숲을 이루기도 한다. 이렇듯 책을 읽으며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내면을 따라가는 즐거움이 크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덤덤해지듯이 몇 년 동안 슈타인을 잊고 지냈다. 평온한 일상이었다. 나이를 먹어가는 편안함은 필요 없는 감정의 격류에 휩싸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느닷없이 망령처럼 되살아나는 공복감으로 허리가 접혀버렸다. 젊은 날에 자주 앓던 인간 본연의 외로움이었다. 사람에게 향하는 허기증 때문에 바람처럼 떠돌던 시절이 다시 재현된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감당하기 어려워 맥을 놓아버렸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혼미 속에서 지냈다.
문득 그 책을 떠올렸다. 책장에서 꺼내 선 채로 뒤적거렸다. 지금까지 스쳐 지났던 대목에 마음이 머물렀다. 슈타인 박사가 니나와 함께 밤을 보낸 후에 쓴 기록이다. 영혼으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같은 방에서 보낸 밤이 아니라 같은 집에서다.

- 니나를 생각하기 위해서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날이 새는 황홀한 시간, 나의 침대는 창가에 놓여 있었다. 나는 정원 너머로 멀리 차갑게 솟아있는 눈에 덮인 산을 바라보고 어둠속에 떠오르는 마당의 숲을 보고……

옆방에서 들리는 사랑하는 이의 기척에 귀를 기울이며 밤새 뜬눈으로 보낸 후 행복해 하는 것이다. 참으로 답답한 사람. 그의 기쁨을 방해하기 싫어서 책을 덮었다.
그리고 새로운 새벽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신선한 여명을 보노라면 마음속에서 분명한 의지가 솟아오를 것이란 기대를 가졌다. 심한 갈증이 수반된 공복감에서 벗어나게 되기를 바랐다. 어둠 속에 앉아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차갑고 막막한 밤이 지나자 먼 곳에서부터 신비롭게 열리는 하늘을 만날 수 있었다.

푸른 바람에 젖어 몽롱하게 눈을 뜨는 하늘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 깊고 우울한 목청으로 새벽을 위해서, 영혼의 회생을 위해서 노래했다. 그 소리는 날이 밝아오는 황홀한 시간 속에서 떠돌다가 내 생의 한가운데로 깊이 침몰해들었다.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