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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수필 1

마음의 약

류인혜


지난 가을에서 겨울까지 법정(法頂)스님의 『山房閑談』을 읽으며 지냈다.
신문에서 그분의 글을 대할 적마다 가슴이 그득해지곤 했다. 드디어 짧은 글만으로는 해갈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조급함으로 그 책을 사들었다. 읽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질 때 조금씩 아끼면 눈으로 마음으로 더듬다 보니 몇 달이 걸린 것이다.
계절이 주는 침울한 분위기가 감정의 짙음을 더 하게 했지만 원하고 있던 적당한 글을 만났다는 재미도 매우 컸다.
바쁜 중에도 문득 넋을 놓고 하염없어지는 묘한 성격이 제물을 만났다고 할까. 글을 따라가다 사람마저 그리워지는 이상한 감흥으로 잔잔한 설렘이 일었다. 문득 그분이 사는 조그만 암자에 날아들어 윤이 나는 쪽마루에 잠시 앉아 나무를 보고 하늘을 보다가 자취도 없이 내려왔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연의 오묘한 조화에서 보는 감히 인간으로는 어찌할 수도 없는 섭리를 생생하게 그려놓아 자신이 속해 있는 모든 조건 속에 뛰어들어 완전히 자유롭게 살아가는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다.
생활을 만족스러움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에서 솟아나는 생각들은 거칠 것 없는 자신감이 넘치게 된다. 또 오랜 시간이 걸려 깨끗하게 여과된 감정의 노출은 투명한 물밑을 보는 순수함이다. 많은 것을 알아 그 앎이 세상에는 덧없어져 도리어 아무것도 모르게 되어 버리는 경지를 보는 듯해 놀라웠다.

사촌언니는 좋은 책을 읽고 나면 얼마나 진지하게 그 책에 대해서 얘기 했던지 나도 덩달아 같이 읽어 감동하는 느낌이 들었고 그만큼 마음에 드는 글을 찾는데 대해 부러움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가 눈치 채지 않게 그것들을 서둘러 읽으려고 얼마나 애를 태웠던가.
그것은 지나친 자존심의 상실이었다.
내가 왜 다른 이와 똑 같은 감동을 해야 될까, 어째서 모든 사람들이 명작이라고 구구하게 얘기하는 것들을 읽어서 그 뒤를 따라 가야만 하는가. 그렇지만 무엇 때문에 어떤 새로움으로 감동하는가 싶어서 꽤 많은 것을 따라 읽었다. 그래서 온갖 종류의 절망과 희망을 함께 보았다.
직접 살아낼 수 없는 여러 인생을 엿보는 재미가 너무 좋아 신이 날 지경이었다. 그중에서 진심으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별로 많지 않다. 책의 내용과 마음의 빈약함이 잘 들어맞아서 충분히 받아들일 상태가 되어 있어야만 많은 감동을 일으켜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은국의 『순교자』를 읽은 것은 고등학교 때다.
종교가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어떤 믿음이 바른 것인지 혼란스럽던 시절이었다. 내가 택한 종교가 아니라 집안에서 믿어온 기독교가 진심으로 필요한 성질의 종교인지 갈등이 심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많아 교무실로 국어선생님을 찾아간 적도 몇 번이었다. 차츰 내용에 빠져들자 문장하나 하나가 주는 의미를 따지기 전 주인공을 따라다니며 그가 구하고자 하는 진실에 동조하여 저절로 뚜렷한 상태가 잡혔다.
격류에 휘말린 듯한 감정의 여러 고비를 지나 내가 바라던 길이 보였을 때의 환희는 마음속에 넣어두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격해진 감정을 처리할 수 없어 몰래 소리죽여 울기만 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신성함을 세속적인 사람의 양심에다 어떻게 인식시켜야 영원히 승화시킬 수 있을까가 커다란 숙제였다. 추상적인 종교관이었지만 어찌하든 내가 믿음을 지니고 있어야 되는 확실함을 인식시켜 준책이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山房閑談』에서 전혀 다른 종교인의 사고를 접하며 종교의 가장 높은 경지를 보는 것 같아 이상한 충격을 받았다.
진실 된 마음이 종교를 커다란 구원의 길로 받아들일 때 잘 정화된 상태가 이런 것이로구나, 감탄하며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가까이에 있는 친근한 것들을 무시하고 먼 곳만 바라보던 허황함이 덧없어 보였다. 많은 사색 끝에 따뜻한 햇살처럼 피어나오는 생각들이 주는 진실 된 목소리에 묻혀 오랫동안 편안하였다. 아직은 생각이 성숙하지 못해도 괜찮다 하면서도 세월이 얼마만큼 지나야 아집이 없는 담담한 시선으로 사물을 대할 수 있을까, 염려가 많았다.

무슨 책을 읽던지 저자가 말하는 전부를 알아채서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 속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눈에 뜨이고 합당한 것만 취하게 된다.
어느 땐가 사람이 만든 모든 지식이 헛된 것이란 생각이 들어 몇 년 간 전혀 책을 들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사람이 잠을 자고 깨어나서 밝은 해를 보고, 공기를 마시며, 배고프지 않게 음식을 먹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사는 평범한 일상 속에 진실이 있으니 그렇게 살아나가면 스스로 이치를 깨닫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람이 많은 교육을 받고 사회의 질서를 배운다면 그것을 올바른 목적을 위해서 쓰일 수 있도록 애써야 된다. 무엇을 알건 간에 배운 만큼은 행할 수 있어야 되는데 어느 쪽으로든 사람의 값어치를 나타낼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무척 심각해 있었다.
그러나 크게 배운 것도 없고 평생 책 한권 든 적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어울려서 살아가는 것에 나름대로 뚜렷한 길이 있고 언제든지 크게 내 세울 수 있는 구체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심한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모든 사람이 그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희한한 경이로움마저 일어났다. 아무것도 모르며 그 무식함을 정당화 시키려던 오만이 우스웠다.
이제 부족함을 어떻게 찾아야 될지 조금씩 알아가는 데 위로가 된다. 정신의 모자람으로 부끄럽게 앓을 때 적당한 약으로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을 구하도록 애써볼 도리밖에 없겠다.(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