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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양순태 |
날짜 : 18-02-13 07:41
조회 : 1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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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감도는 음률 (1)
양순태
손을 내밀면 하늘빛 잉크 색이 묻어 날 듯한 시리도록 맑은 아침이다.
산기슭에 마른 잔디 위로 작은 회오리 바람의 소용돌이가 먼지를 일으키고 사라지노라면 저 만치서 연이어 옹골찬 속력으로 호르르 날아 재빨리 휘감아 돈다. 낮으나마 날렵한 기세가 예사롭지 않은 낙엽 휘둘림에 바람의 강도를 알린다.
음 으으 음으...
어디선가 스산한 공기에 젖어 흐르는 무거운 음률, 어렴풋이 와 닿아 가슴으로 스며드는 비가悲歌. 귀 기울여 주위를 두리번거려도 포착되지 않는 근원지를 찾아 발길을 옮긴다.
광활한 공원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잔디 마당 조각공원에 우직한 걸작들이 띄엄띄엄 자리하여 작품의 중후함을 더하는 가운데, 외진 곳에 멀뚱하게 서 있는 로봇. 하늘아래 홀로 인 양 어정쩡한 자세가 애처로움을 가중시키는 거장이다.
윤곽이 뚜렷한 면모에 세상사 훌훌 털어 버린 듯 초점 잃은 표정으로 허공을 향해 흥얼거리고 있다. 한세상 부귀를 몸소 누렸을, 겉으로 배어나는 담담한 형상. 그럼에도 무언가를 갈구하는 심경이 엿보인다.
연속적으로 회오리 바람은 자생하여 살그머니 요동친다. 역력히 억제하고 있는 오싹한 느낌이 어깨를 움츠리게 한다. 한 차례의 폭풍 또는 추위를 몰아올 것 같은 기세가 삭막 감을 더 한다.
이른 아침 외출채비를 하며 예고없이 전화벨을 울린다. "아저씨, 지금 나오실래요?" "응 그래." 상의를 걸치고 나가면 저기 오신다. 물병을 준비하여 뒷좌석에 모시고 안전벨트를 끼워 드린다. 우리는 그렇게 드라이브 길을 나선다.
40여분거리의 파주 온천장에 위치한 단골집에서 아침식사를 한다. 즐겨 먹던 불고기 낙지전골과 대나무 통술, 아저씨의 반주로 두 잔을 드시고 남은 술은 댁에 가서 드시라고 챙겨 넣는다.
푸짐한 상차림의 포만감으로 문산 들판을 가로지르는 통일로를 벗어나 임진각에 머무른다. 이산가족의 한이 서린 자유의 다리를 거닐고는 연못을 한 바퀴 돌아 나온다. 자판기의 커피도 마시고 매장에 들려 눈길 끄는 물건이 있으면 재미로 사기도 한다. 찬 공기에 포근한 감촉의 모자를 선택해 씌워 드린다. 따뜻해 보여서 즐겁다.
질주의 쾌감과 스릴이 교차하는 자유로를 달리며 일상 속에 일어나는 소소한 먼지들을 날려 보낸다. 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강 건너 이북 땅 민둥산의 냉기는 저 동네의 이념성을 대변하는 듯하다. 바람이 차다. 드넓게 펼쳐진 임진강 줄기가 가슴 트이게 하는 실내매장에 자리하여 앉는다. '아침을 달게 먹었더니 갈증이 난다'시며 팥 빙수를 청한다. '입맛이 없다가도 이렇게 기분전환을 하고 나면 음식이 당긴다'는 말씀이 너무 고맙다.
올해 79세의 어르신. 친정 아버지 가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맺은 인연으로 아버지처럼 대우하였으며, 딸같이 맞아 준 이웃 할아버지다. 성격 외모 걸음걸이에서 모자 쓰시는 폼까지도 아버지를 무척 닮은 모습이다. 처음 뵐 때는 아버지가 환생한 듯한 착각이 들었을 정도였으니.
궂은 날이면 전을 부쳐 막걸리를 준비하여 출출함을 채워 드리고 음산한 날이면 미역을 넣어 끓인 육수에 찹쌀 경단을 빚어 영양보충을 해 드리기도 한다. 음식을 푸짐하게 마련하는 날이면 집으로 초대해 상을 차려 모신다. 가족 모임에도, 남편과의 외식에도, 드라이브 길에도, 동창회에까지도 모시고 나가는 존경하는 어른이시다.
글을 써서 내밀면 문장을 훑어 보아 지적해 주기도 하며, 어떠한 질문에도 만사형통인 할아버지. 그러나 아저씨라 부른다. 매사에 곧은 사고와 덕을 겸비한 선비이시며 소중한 인연이기에 내심 세월을 붙잡아 두고자 하는 바램에서이다. 친정 아버지의 정을 또 잃고 싶지 않은 간절함이기도 하다.
초보운전 시절에는 주차안내를 도맡아 주었다. 특히, 미숙한 후진 시에는 번번이 엉뚱한 방향으로 이탈하노라면 참다 못해 버럭 화를 낼 때도 무섭지 않았다. 아버지 같았으니까. 붉으락푸르락한 표정에서부터 더 놀랄 땐 안색이 하얗게 변하기도 할 정도로 마음고생을 시켜 드렸다.
"운전실력 완벽하면 맨 먼저 모실게요" "아이고 네 차 안타련다"시며 손을 내저으시곤 했으나 6개월 후 약속대로 첫 탑승자로 모신다. "운전 점수 몇 점 주실래요?" "80점." "그럼20점은요?" "후진 미숙이다." 지난 날의 놀란 앙금이 가시지 않으신 것 같아 웃음으로 자신감을 전한다. 그 때는 물병과 재떨이만 준비하면 그만이었는데 십여 년 사이 언제부턴가 기본 상비약을 조심스레 넣고 다닌다.
"아저씨 오래 사셔야 돼요 그러실 거죠.? 잠시 스치는 상념에 우울이 드리운다. 삼 남매를 출가시킨 다복한 가정에 살뜰한 마나님의 다독임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들어 노년 우울증을 앓고 계신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다.
산 언덕 아래로 유유히 흘러가는 썰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생선비늘을 쏟아 부은 듯 은회색의 잔잔한 파고가 서럽도록 아름답다. 멍하니 넋을 놓고 바라보는 왜소한 어깨가 슬프고 강바람에 일렁이는 나뭇가지들의 몸부림에 낙엽 흩날리는 풍경이 을씨년스럽다.
서둘러, 기우는 세월을 끌어당겨야겠다. 별식을 찾아 미식가로서의 명분을 세워도 드리며 마음의 허기도 푸근한 훈기로 채워질 수 있도록 정성을 다해야 할 일이다. 드라이브의 속력은 한 단계 느리게 하여 경치를 감상할 시간을 연장시켜야겠다. 그리고 천진스런 아이의 모습으로 맛있는 밥 한끼 사 달라고 청함에 흐뭇해 하는 모습을 보고도 싶다. 주나라의 노래자는 70세가 되었어도 동자의 모습으로 재롱을 부려 부모의 늙음을 잊게 해 주었다는 노래지희老萊之戱에 의한 속설을 되새기면서. 지는 해를 바라보는 서글픔을 떨치고 맞이하는 새 날의 기쁨을 안겨 드리기로 잎 지는 계절에 마음은 분주해진다.
가슴이 허허로와 허심 증虛心症이라 했던가. 그것은 우리모두의 증세일 수도 있다.가까운 부부, 가족, 또는 친구로 인해서도 이웃들에 의해서도 소외감을 갖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계절적이며 시기적인 이유에서도 발병의 원인이 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두루두루 주위를 둘러보아야 할 허무의 계절에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을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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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8-02-14 02: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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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사이의 인연이 이렇게도 소중한 것인지 예전엔 미쳐 몰랐습니다. 훈훈한 입김이 흐르는 분위기가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앞으로도 꼭 그렇게; 아름다운 만남으로 이어지시기를 바랍니다. 양순태 선생님 !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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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순태 |
18-02-14 05: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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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재문 선생님 반갑습니다.
이웃 할아버지와 맺은 십수년의 인연에 그리움만 남은 것 같습니다.
마음 둘 곳 쉽지않은 도시생활에서 저에게 늘 웃음꽃을 선물해 주셨던 어른이셨습니다.
이 순간 지난 날 선생님의 환한 웃음도 그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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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권섭 |
18-02-22 1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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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태선생님 참으로 천사의 모습입니다. ‘老萊之戱’는 자식이 늙은 어버이에게
기쁨을 드리려고 하는 재롱이었는데, 존경하는 그 어른 아저씨에게 노래지희의 정성을 쏟았으니
아름다운 계절 봄날의 꽃을 보는 듯 보기가 좋습니다. 양선생님은 천하의 멋쟁이 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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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순태 |
18-02-23 07: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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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권섭 선생님의 과찬에
저의 재롱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어른의 모습을 다시 뵙는 느낌입니다.
늘 곱게 바라봐 주심에 몸둘바를 모르면서도 선생님의 방문은 즐겁습니다.
살면서 다시 또 어떤 인연이 다가올지 모르지만 만남보다 이별이 두려워 망서려 질것만 같습니다. 다가오는 봄기운에 김권섭 선생님의 선한 모습에도 환한 웃음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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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병식 |
18-03-09 09: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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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감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어른신을 모시고 계시군요.
인정많으신 것을 알고 있으니 얼마나 잘 모시는지는
능히 짐작이 됩니다.
좋은글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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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순태 |
18-03-10 06: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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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식 선생님 들리셨군요 감사합니다
이웃에 맺은 인연으로 할아버지와의 만남과 이별을 두편의 글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전편은 전에 발표 했었지만 후편의 이해를 위해 함께 올렸습니다
사는일도 계절같아 만남이 봄이면 이별은 가을같아 쓸쓸하지요
다행히 매서운 겨울 감정이 아니었기에 고마운 인연이라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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