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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양순태 |
날짜 : 18-02-13 07:39
조회 :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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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공에 감도는 음률 (2)
양순태
옷깃을 여미게 하는 스산한 공기에도 그리움의 자락에는 정감이 묻어 난다.
어쩌면 기대보다 단념이 어울리는 계절이라 할지라도 고운 빛깔로 물들여 멈춰진 시간 속으로 이 가을도 어김없이 추억의 길을 나선다.
어둠이 내린 시간에 대문 앞 계단에 어른이 앉아 계신다. 반색을 하며 들어오시지 않고 어찌 여기 계시느냐며 저녁은 들었는지 여쭸더니 아직 식전이라는 표정이 전에 없이 무덤덤하다. 냉장고에 육계장이 준비되어 있음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상 차릴 마음이 분주해진다. 어디선가 아련하게 들려 오는 괘종시계가 9번을 울린다. 비몽사몽에도 눈뜨면 사라져 버릴 듯한 할아버지의 영상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서러움에 숨죽인다.
햇살도 따끔거리던 한파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아침 평소처럼 남산을 산책 다녀 온 후 뇌출혈로 80수를 접은 채 아드님네 이웃아파트로 거처를 옮기며 연락이 두절된 할아버지. 초조한 기다림의 연속으로 6개월이 지날 쯤, 며칠 전부터 수시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신경이 쓰인다. 받으면 묵묵부답이요 말 중에도 끊어 버리기 일쑤다. 벨이 울리고 그침을 반복하던 중 순간의 감격에 목이 메인다.
"0000-0000번이지 양순태냐? 내 다른 것 다 잊었어도 네 전화번호는 기억해냈다."
망각의 시간 속에서 하나하나 기억의 파편들을 이어 맞춘 숫자였으리라. 자신이 누른 번호를 재확인 하는 노인의 상기된 음성을 향한 집중력은 온 신경을 수화기 속으로 파고들게 한다.
어눌한 발음으로 한마디 한마디 힘들게 이어 가는 말뜻을 이해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수많은 날들에 쌓인 궁금증이 태산같은데 내 말에는 안중에도 없이 그간의 사연이 끝이 없다. 목청 높여 비집고 파고들래도 틈을 주지 않는다.
'정말 많이 기다렸어요 아저씨, 참 많이 찾았어요. 연회 색 양복에 중절모를 쓴 단정한 모습에는 눈이 번쩍 뜨이곤 했습니다.' 걸음이 불편한 뒷모습을 보면 잰 걸음으로 달려가던 안타까운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내가 귀가 멀어서 네 말은 듣지 못한다. 내 또 전화할게" 끊어진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 적막감은 수백미터 절망의 낭떠러지 암흑 속으로 곤두박질친다.
얼마나 그리우실까 정든 이 곳이, 단풍으로 물든 남산, 한적한 산책로, 서울타워 회전전망대에서 펼쳐지는 수도서울의 웅장한 전경, 불타는 석양, 땅거미 내리는 남산 숲, 불야성을 이루는 시내야경, 춤추는 국립극장, 궁중요리의 별식 지화자 등등.
수시로 거닐었던 과천대공원, 조각공원 잔디밭, 드넓은 하늘아래 강바람을 거슬렀던 자유로며 임진각을, 하늘이 유난히 맑고 파랗던 저 아래 목천의 전쟁기념관에도...
반가운 음성만으로도 소중한 인연을 추억할 수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지막성찬이라 해도 좋을 눈물나도록 맛있는 밥상을 마주할 수 있기를 소망해 본다.
'지난날 네 한테 대접받은 밥 빚 갚으려고 용돈 챙겨 두었다'던 내면에는 바람을 쏘이고 싶다는 말씀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지금껏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설마 저승길 노자 돈으로 쓰신 건 아닐지 부디 '양순태 전화 받아라'며 요란스레 벨을 울려 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다.
밥그릇에 인심 난다는 속담도 있듯이 우리는 참으로 많은 밥을 함께 먹었다. 가게를 운영하는 탓으로 한 달이면 서너 차례 한꺼번에 음식을 마련하는 날은 그야말로 성찬의 초대상이다. 새로 장만한 음식들은 구미를 당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소식小食을 하지만 맛나게 드시는 모습은 언제나 보람을 안겨 준다.
그 옛날 객지로 향하는 딸에게 '네가 서울가면 맛있는 음식은 누가 해주나' 하시던 아버지 말씀이 아릿한 여운으로 남아 입맛이 깔깔해진다는 노년의 식성을 염두에 두게 된다. 집안가족 모임에도 친아버지 모시듯 형제들의 정성도 깍듯하여 화기 애애 했던 순간들, 미식을 찾아 목적지를 향할 때의 기대감에 들뜨고 밥상을 마주하는 행복감은 매 번의 축복이었음을.
제각기 가정을 이룬 자녀들은 나름대로 효를 다하고 손끝 매운 마나님에 남부럽지 않은 노년기였다. 몸에 배인 선비로서의 자세는 어느 한 순간 흐트러짐 없이 단아했다. 행동거지 말 한마디에 각별한 관심으로 살펴주심에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칠 때도 반가움에 달려가게 되는 어른이다. 뒤돌아보면 서로를 배려하며 부녀간 못 지 않은 십수 년의 인연은 참된 믿음에서 우러나는 웃음과 기쁨의 단짝이었던 것 같다. 현실적으로는 이웃 어른이요 살가운 정으로는 아버지와 막내딸이며 정신연령으로 보면 서로가 애틋한 할아버지와 손녀같이.
언제나 친근감을 주는 남산 등성이에 자리한 느티나무의 단풍은 순하게 물든다 사계절 자연에 순응하여 초연 담담한 모습으로. 굳건한 고목의 가지들은 울창한 숲을 이루어 서울타워를 찾는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두 세기에 걸쳐 남산에 운치를 더하는 자태가 그리운 할아버지를 연상케 한다. 어느 듯 공기를 가르는 삭풍에 춤추던 갈잎도 기름진 세상을 약속하며 추억이 깃든 옛이야기 담아 켜켜이 쌓여 간다.
지난밤 꿈속에서 재회한 님의/ 놓쳐 버린 손길에 먹먹한 가슴/ 희 뿌연 산책로에 비가 내린다.
계간시원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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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재문 |
18-02-14 0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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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인연은 또 그렇게 아름다운 추억으로 거듭나는 군요. 이제 저도 긴 겨울잠을 끝으로 비상의 날개를 달아볼까 합니다. 새봄이 왔으니까요. 우리 아파트 뒷베란다 창문이 사르르 열리는 것을 보고 봄이 왔다고 환호성을 내질렀습니다. 야호 ! 새봄입니다. 양순태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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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순태 |
18-02-14 0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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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선생님 내일은 봄입니다. 그러기에 섯달그믐에 올리게 되었어요.
추억도 계절따라 다른느낌으로 다가오기에 꽃이피면 할아버지의 웃음띤 모습이 그려지겠지요. 설명절 즐거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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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권섭 |
18-02-22 1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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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순태선생님의 따뜻한 정이 묻어나는 작품 감동으로 주체를 못합니다.
원래가 착하시고 다정다감하심이여! 고운 심성 천사도 흠향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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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순태 |
18-02-23 0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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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권섭 선생님 반갑습니다.
대지를 적시는 비님을 앞세우고 오신 선생님의 방문에
봄이 성큼 다가선 듯 신선한 기운을 느낌을 느낍니다. 소중한 인연을 공감해 주심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참된 인연으로 오래토록 기억에 남을 할아버지의 모습은 변치않는 향기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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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만성철용 |
18-02-27 1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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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만에 들렸더니 귀한 나들이를 하셨네요. 천사 같이 베프는 사랑이 아름답기 그지 없네요. 아저씬가 할아버진가가 부러울 지경입니다. (1)보다 (2)가 더 글이 좋아 보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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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순태 |
18-02-28 05: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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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선생님 그 어른께서도 저의 삶을 한층 윤택하게 해주셨어요
가게를 운영했기에 저는 스트레스 해소로
할아버지는 기분전환을 위해 바람쇠러 나가기에 스스럼없는 단짝이었습니다
도시생활에서 할아버지를 이웃함으로 제겐 더 없을 행운이었던 같습니다.
만약 일만 선생님과 이웃하면 선생님을 졸졸 따라다녀 귀찮게 해드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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