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의 산마루에서

최원현

nulsaem@hanmail.net

발걸음이 바빠졌다. 마음도 급해졌다. 많이 남은 줄만 알았다. 왜 가야 할 길을 멀리까지 바라보지 않았을까.

숲은 늘 그대로였다. 나무도 늘 그랬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숲의 색깔이 바뀌고 있었다. 이파리들이 달라져 있었다. 그랬다. 가민 있는 것은 없었다. 변하고 있었다. 나만 보지 못하고 듣질 못 했었다. 그들이 치는 종소리를, 그들이 내는 바쁜 발자국 소리를 그리고 그들은 거기 늘 그렇게 한 모습으로만 있을 거라 믿어버렸다.

한솔 선생님, 다시 한 해가 가고 있습니다. 산마루에 올해의 해가 위태롭게 걸려 있습니다. 손을 펴 2017년에 인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또 한 해가 가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부음을 뒤늦게야 들었습니다. 너무나도 건강관리에 철저하셨고 50년을 생식을 하셨고 등산으로 단련된 체력이었으니 선생님은 백세쯤은 거뜬하리라 생각했던 게 제 불찰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소식을 못 들은 지가 꽤 오래 되었는데도 여전히 건강하실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한데 아주 우연히 선생님께서 지난 해 유명을 달리 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죄송스러움과 안타까움을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뭔가 배반을 당한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 일어나버린 것 같은 황당함으로 한참을 멍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또 한 해가 가는 것을 보면서 서쪽 산마루에 걸린 넘어가는 해를 보면서 아직도 철 덜 든 저를 보게 되고 순리가 뭔지를 생각게 됩니다. 지는 해를 바라보는 저도 언젠가는 선생님처럼 가야 할 유한한 생명임을 가끔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올 한 해만 해도 쓸데없는 고집은 얼마나 부렸으며 안 내도 될 욕심은 또 얼마나 냈습니까. 나 아니면 안 될 것처럼 교만해 진적은 또 얼마나 많았고요. 내려놓는다 줄인다 해놓고도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는 내 짐들의 무게도 늘 다른 탓이라 억지를 부렸습니다.

선생님이 계셨던 세상이나 아니 계신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짐이 없이 사람들은 저마다 갈 길을 가고 할 일을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건 있습니다. 그리움입니다. 그리움이 커진 것, 그리움이 짙어진 것, 그건 내 곁에 있지 않는 것들에 대한 내 사랑의 표현 아니겠습니까. 떠나간다는 것, 보낸다는 것, 다시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안타까움이고 슬픔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회복할 수 없기에 그리움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다시 한 해를 보냅니다. 그리움의 시간들이 하얀 가루가 되어 날아가는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넘어가는 해를 좇아 달려간 산마루에서 저 멀리 또 다른 산마루에 걸려있는 해를 봅니다. 해서 다시 희망을 갖습니다. 해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산마루를 하나 넘듯 다시 다른 산마루를 넘어 내게로 또 한 해를 보내오고 있으리라는 믿음입니다. 하니 이 해를 보내는 마음도 소망이 됩니다. 선생님은 안 계시지만 올해처럼 내년도 그렇게 다시 열릴 것이고 저는 또 열심히 올해처럼 내년도 잘 살 것입니다. 하지만 올해의 해가 이렇게 산마루를 넘어가고 있습니다. 산마루가 온통 사랑으로 그리움으로 노을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습니다.

최원현

수필가·문학평론가.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사)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 사)한국문인협회·사)국제펜한국본부 이사. 강남문인협회장·한국수필작가회장(역임).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월간문학상 수상 외,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등 16권. 《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평론집 2권. 중학교 교과서《국어1》《도덕2》 고등학교 《국어1》《문학 상》 등 여러 교재에 작품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