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놈

최원현

nulsaem@hanmail.net

그놈은 정말 도망도 잘 가고 숨기도 잘 한다. 분명히 나를 따라온 것 같은데도 돌아보면 간 데 없다. 같이 왔고 같이 있었다는 증거조차 없다. 내 안 어디로 숨어버린 것일까.

분명히 뭔가 하러 왔는데 왜 왔는지를 모르겠다.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 다시 생각을 해 보아도 알 수가 없다. 그 놈 때문이다. 또 그놈이 장난을 친 것이다. 놈은 하는 짓마다 얄미울 정도로 아주 감쪽같다. 알리바이조차 필요 없다. 시쳇말로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고도 전혀 아닌 체 한다. 언제 그랬느냐, 아니 그런 일 자체도 없었다고 시침을 뗀다.

녀석이 내게 온 게 언제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오라고 한 것도 같이 있자고 한 것도 아닌데 어느 날 슬그머니 내게로 와서는 나와 더불어 다니더니 어느 날부터는 제가 나인 양 내 대신 제 멋대로 뭐든 하고 만다.

문제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제가 해 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인지도 모르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내 할 일도 못 하는 것 뿐 아니라 무슨 일을 못 하게 되었는지조차 모르게 된다. 그러고도 뭐든지 저는 아니란다. 그런 일 없었단다. 전혀 모른단다.

그렇게 하고도 녀석은 조금의 미안함도 없다. 오히려 당당하며 뻔뻔스럽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울 게다. 거기다 얼마나 천연덕스러우냐 하면 자기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걸로 해 버린다.

젊었을 때도 가끔 그놈에게 당하긴 했지만 그땐 그럴 수도 있지 했다. 밉긴 했지만 그러다 말겠지 했다. 한데 어느 때부턴가 가끔이 아닌 대낮 활보를 더 이상은 두고만 볼 수가 없다고 생각이 되어 나름의 제제를 가하려 해도 녀석의 안하무인 도도함을 속수무책 막을 수가 없다.

요즘엔 그런 그 놈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내가 한심스럽기도 하고 바보스럽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다. 자괴감이 들 정도다. 슬퍼진다. 내가 왜 이러지? 나를 억제할 수 없을 때도 생긴다.

그런데 보니 내게만 그러는 게 아닌가 보다. 나 말고도 내 주위에서 그놈에게 당했다거나 그놈 등쌀에 못 견디겠다고 아우성인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거기서 더 심해지면 그걸 피해 집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그런 피해자들만의 집합소인 공동 거주공간도 많이 생겼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놈을 떼어버릴 수는 없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덜 가도록 그놈과의 동거구역을 달리하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그 모든 상황을 수용하는, 말하자면 녀석에게 손발 모두 들어버린 채 얌전히 아니 그가 하는 대로 있겠다고 항복을 해버린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내가 말하는 피해자가 다 그놈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그놈보다 더 독종에게 걸린 사람들이다. 놈은 장난스럽게 일을 벌이지만 그 독종은 정말 인정도 사정도 없는 독하디 독한 놈이다. 내가 그 독종에게 걸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될 정도다.

어제도 난 녀석 때문에 혼이 반이나 나갔었다. 행사가 있어 노트북을 챙기면서 USB메모리를 별도로 챙겼다. 그런데 분명히 챙겼던 그 USB를 집을 나서면서 확인 하는데 없다. 내가 분명 챙긴 것이 확실한데 어디서도 그게 나오지 않았다. 내 노트북은 최신형이라 빔 프로젝트를 사용할 때 기존설비와 호환이 안 되곤 하여 USB에 내용을 담아 따로 가져가는 것인데 그걸 어디에 넣었는지 어디다 두었는지 알 수도 찾을 수도 없는 것이다. 둘만한 곳 내가 그걸 넣었을만한 모든 곳을 다 찾는 정밀 수색을 했는데도 없다. 만일 그걸 못 가져가면 지난 밤 새워 만들었던 영상도 화면으로 보여줄 자료들도 없어 회의진행이 아예 안 되는 것인데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은 자꾸 가는데 속은 더욱 까맣게 타고 급기야 온몸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도대체 어디다 두었단 말인가. 너무 잘 두었다는 말이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일까. 이렇게 되면 희망은 하나 내 노트북을 쓰는 것인데 지난해의 경험으론 그걸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아주 우연히 모자 위를 보게 되었는데 그게 거기 떡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모자를 쓰고 갈 것이니 거기 얹어놓으면 틀림없다 싶어서 올려놓았던 것을 까맣게 잊고 양복 주머니로부터 가방 주머니며 책상 서랍이며 위아래까지 다 뒤졌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그래놓고도 그리도 기억을 못 했을까. 물론 금년부터 쓰기 시작한 모자라 가끔씩은 그 존재를 잊기도 하는 처지이지만 분명 그놈 장난이다. 어디선가 지금도 이러는 나를 보며 재미있어 죽겠다고 키득대고 있을 것만 같다. 한 시간 반을 그랬으니 그간의 내 마음이 오죽 했겠는가. 그런데 갈수록 녀석에게 당하는 횟수가 늘어나니 큰 문제다. 혹시나 그놈의 장난질인 건망증만이 아닐까 해서 얼마 전엔 그놈보다 독종이라는 치매 테스트도 받아봤었는데 그건 아니라고 했잖은가. 그런데 그 사이에 큰 변화라도 있단 말인가.

우리 집안에선 외할머니가 말년에 치매로 고생하다 돌아가셨다. 그리고 막내이모가 치매였다. 그러나 큰 이모는 아흔을 바라보면서도 얼마나 정신이 맑으신지 모른다. 장모님이 약간의 치매로 고생 하셨기에 아내에 대한 걱정이 있다. 그런데 내가 이러는 건 뭔가. 가끔은 사람을 앞에 마주하고도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애를 먹은 때도 있다. 내가 그렇다고 했더니 너도 나도 그렇다고 해서 조금은 위로가 되기도 했지만 이처럼 기억력이 나빠진 건 그놈 장난만이 아니라 다섯 번이나 수술을 받은 마취의 후유증이 아닐까 은근 걱정도 된다.

사람의 기억이란 언제까지 얼마나 많이 할 수 있는 것일까. 깜박깜박 하는 게 비일비재라며 말들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도 오늘 같은 일을 얘기하면 그건 심하다고 할 것인가. 아무래도 이건 환경 탓일 것 같기도 하고 온갖 스트레스의 결과일 것 같기도 하다. 여하튼 그놈을 더 이상 가까이 접근할 수 없도록 무슨 비방이라도 써야 할 것 같다. 전화기를 들고도 전화기를 찾는가 하면 리모컨을 냉장고에 넣어둔다는 사람, 만날 약속을 해놓고도 깜박 놓치고 마는 사람, 이 모든 사태가 그놈 때문인 게 분명한데 그놈 막아낼 뾰족한 방법은 정말 없는 것인가. 이러다가 아예 기억을 통째로 잃어버리게 한다는 그놈보다 더한 독종과 만나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앞선다. 언젠가 바이러스로 내 컴퓨터가 순식간에 먹통이 되어버렸던 것처럼 그리 되는 것은 아닐까 겁이 난다. 하지만 놈과 싸우다 보면 그 독종을 막아낼 힘도 생기지 않을까. 그래도 세상을 사는 것은 하나같이 관계인데 자칫 그놈 때문에 오해가 생겨 그 관계에 흠이 생길까봐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진실보다 먼저 오해는 오기 때문이다. 어쩠든 그놈의 장난질에 놀아나지 않도록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 그래도 두렵다. 지금 이 순간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를 어떻게 골탕 먹일까 호시탐탐 노리고 있을 그놈 제발 그놈 좀 막아주세요.

세상이 어수선하니 놈까지 제 세상인 줄 설치는 것 같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을 잃지 않으면 산다 했는데 정신 먼저 혼미해져 버리게 하는 그놈을 막을 방법 좀 알려 주세요. 그런데 어찌 생각하면 그놈은 나를 늘 긴장 시켜서 살아가는 힘을 더해 주는 것 같기도 하다. 깜박 깜박 정신 줄을 놓게 하는가 하면 금방 한 일도 생각나지 않게 해버리는 얄미운 그놈이지만 결국엔 같이 살이야 되지 않을까. 제발 그놈 좀 을 어찌 해야 할지 가르쳐 주세요. (2017 여름호, 계간수필)

최원현 http://cafe.daum.net/Essaykorea

『한국수필』로 수필, 『조선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사)한국수필가협회 사무처장. 사)한국문인협회·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수필작가회장·강남문인협회장 역임. 한국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현대수필문학상·구름카페문학상·현석김병규수필문학상·월간문학상 수상,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오렌지색 모자를 쓴 도시》《그냥》등 14권,《좋은 수필 쓰기와 바르게 읽기》《창작과 비평의 수필쓰기》등 2권의 문학평론집이 있으며, 중학교 교과서《국어1》《도덕2》,고등학교《국어》《문학》 등에 수필 작품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