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류인혜 선생님 부군 이장수(시인) 선생님의 장례식장에 다녀와 옛 글들을 카페에 옮기는 작업을 하는 중 강봄내 회원을 떠나보낸 날의 심회가 글로 쓰여진 것이 있어 옮겨본다. 강봄내 회원은 1993년 고창에서의 작가회 세미나를 끝으로 우리 곁에서 떠나갔다. 그 다음 해 어디엔가 발표했던 글인 것 같은데 강봄내 선생을 아는 분이나 모르는 분이나 같이 나누고자 여기 올려본다. 이 일이 그의 일만이 아니라 곧 우리에게도 올 일이기에. 그러니 사랑하기만도 모자랄 우리의 시간들이기에 보다 사랑하고 이해하는 내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글을 옮긴다. 벌써 유듀영 회원을 시작으로 우리 회원들도 많이 떠나가셨다.
남은 자리, 떠난 사람
-수필가 故 강봄내 님을 생각하며-
최원현
창가의 난들이 왠지 기운이 없어 보인다.
브라인드를 걷어 버린 낮 동안 강한 햇볕을 그대로 받다 보니 그리 되었나 보다.
제 스스로를 위하여, 내리 비치는 따가운 햇살을 어떻게 해 볼 수도 없는 안타까움 속에서, 온종일 도리 없이 받아내었으니 저만큼 지치지 않을 수도 없었으리라.
수필가 ㄱ여사의 부음을 들은 것은 밤 11시가 넘어서였다. 일이 있어 늦게야 귀가했더니 대전의 ㅇ수필가로부터 ㄱ여사가 새벽에 운명하였노라는 소식을 전해 왔다는 것이다.
너무 늦은 시간이어서 전화도 못하고,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대전으로 전화를 했다. 대전 성모 병원에 안치되어 있다고 했다.
한창의 나이, 어쩌면 고생스런 시기는 다 보내고, 이제 인생의 황금기를 맞았다고 할 수 있을텐데 이게 웬일인가.
나의 생명이 결코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절감케 한다.
대전으로 내려가 작품 활동과 방송 일과 교회 일을 그렇게도 열심히 하더니…….
지난 해 4월 17일은 우리 수필문학회가 세미나를 갖던 날이다.
말로만 듣던 고창의 선운사, 그곳에서 우리는 수필문학 세미나와 정기총회를 가졌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 더구나 다른 여타의 모임과는 달리 수필가들의 모임에는 유난히 정들이 많다.
그곳 명물 풍천 장어에 선운사 동백꽃, 일출 등 추억거리를 아이들마냥 소록소록 가슴에 안던 우리들이다.
그런데 그 날을 사실상 바깥 나들이의 마지막으로 하고 그 날로부터 일 주일 만에 암 수술을 받게 되었고, 그리고 그로부터 꼭 일 년을 살고는 이 땅을 떠나고 만 것이다.
그 동안 그녀의 투병은 참으로 소망적이면서 눈물겨웠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서 오히려 그녀를 향해 할 말을 잊는 자신과 자신의 병을 아는 사람들을 위로하곤 했다.
사람이 아프게 되면 괜스레 주위 사람들까지 힘들게 하기 마련인데, 그녀는 오히려 자신이 조금이라도 짐이 될까 봐 여간 조심한 것이다.
남해의 한 기도원에서 그 금쪽 같은 남은 생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면서도 마감날까지도 보내신 이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고 담담히 자신을 받아들이던 나날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따스함을 주었던 많은 이들의 사랑에 그저 감사하며, 눈물겹도록 그 사랑들을 소중하게 끌어안으며, 이 땅에 보내주셔서 그런 많은 사랑 속에 이만큼이나 살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녀였다.
그녀는 떠나는 것조차 살그머니 뒷문을 열고 나가는 것처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정말 조용히 떠나가 버렸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떠났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지 않고, 결코 그녀가 이 땅 우리의 하늘 아래에 없다는 것 자체가 실감나지 않게 하는 것 또한 그녀다움인 것 같다.
사실 나는 ㄱ여사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다.
수필작가회의 한 회원으로, 신앙 생활을 열심히 하는 신앙의 동료에다 극동방송, 낮은 울타리 등 연결체를 통해 가끔씩 전화나 편지로 신앙적 상의를 해왔던 것이 전부다.
그러면서도 그녀의 성격이 맡겨진 것만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해내고 마는 신앙적 자세로 매사에 임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전 극동방송에서 작은 프로를 맡아 오다 조금 더 시간을 많이 내야 하는 프로를 맡아 달라고 했을 때, 그녀는 늦은 시간인데 전화를 했었다.
쉽게 결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괜히 맡았다가 그 프로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게 되면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도저히 자신이 없다고 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 프로에 대한 책임감이 더 앞선다는 것이다.
자신이 승낙함으로써 정말 잘 해 낼 수 있는 사람이 기회를 얻지 못하면 어떡하느냐는 것이었다.
내가 얼마 전, 서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소개해 주었던 선교회의 간사가 적임자일 것 같다며 그 쪽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나는 그때 그 말을 들으면서 그런 마음이면 누구보다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격려해 주었었다.
대개의 사람들이 방송쪽 일들엔 상당한 호감을 갖고 있고, 그래서 남의 것까지라도 서슴지 않고 빼앗으려고까지 하는 시대인데 ㄱ여사의 마음씀은 조용한 아름다움이었다.
나무는 베어 넘어져 있을 때에 비로소 정확한 크기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사람도 그런 것 같다.
살아 있을 때에는 그 가치도, 그 크기도, 그의 됨됨이도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여러 모습으로 보이기에 그의 진면목을 알기 힘들지만 그가 떠나고 나면 그가 있던 자리의 크기로 우선 그를 알게 되고, 그 자리가 비어 있음으로 해서 주위 사람들이 받는 느낌으로 그의 비중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본다.
남겨진 남편과 아이들에게는 더없는 아픔이요, 슬픔이요, 고통이건만 결코 그녀는 그렇게 훌쩍 자신이 떠남으로 남겨 놓은 자신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아픔과 슬픔과 절망만을 지우진 않은 것으로 안다.
한 송이 민들레꽃처럼 여기저기에 더 많은 자신의 분신인 날개 달린 씨들을 날려 보내어 어디서도 자신이 살아 있게끔 해 놓고 간 것이다.
그가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으며 펜으로 썼던 월간 「건강과 생명」지의 투병 간증도 그 하나일 것이다.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바람으로, 부시지 않은 빛으로, 더러는 아주 아주 가느다란 빗줄기로 남아 있는 그녀의 작품들을 모아 그의 동생이 책으로 묶어 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삶을 흔적이라고 하지 않던가.
지나온 내 발자국을 확인해 본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련만 나의 흔적에 대한 책임은 오직 나에게 있음이 아니겠는가?
보내신 이의 품으로 돌아간 ㄱ여사가 그를 아는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아쉬움으로 남아 있는 것은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문득, 매일 저녁마다 잠들기 전에 새롭게 유서를 쓰곤 한다던 어느 분의 얘기가 가슴 속을 뜨겁게 한다.
창가의 난들을 옮겨 주어야겠다.
살아 있음이나, 살았음이나 모두가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랴.
선운사 세미나 때의 그 햇볕 같은 햇빛이 창가에 가지런히 내리고 있다.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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