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은 어디까지 믿어야 하고 얼마나 속으면서 살아야하는지. 술과 담배로 찌들은 생활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날이면 날마다 술에 쩔어 집에 들어와서는 좁은 방안에 뚫려 있는 작은 창문을 연통삼아 독한 담배연기를 당당하게 뿜어내고는 했다. 이건 처자식과 사는 건지 술과 담배와 사는 건지 구별이 잘 안 되는 그런 생활이었다.

그래도 술 주사 같은 것은 없어서 가족을 못살게 굴지는 않았지만 술 냄새 담배 냄새로 아내와 언쟁은 끊이질 않았다.

“미안해, 앞으로는 팍팍 줄여 볼께” 하고 사과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그러면 아내는 한참을 무슨 생각을 하다가

“그래요 믿어 볼께”하고 한발 양보하면서 격려해주고는 했다.

유월 어느 날 몹시 심한 감기에 걸려 고전하고 있었다. 집에 가는 길에 동네 선술집에 들렸다.

“주모, 소주 한 병하고 고춧가루 좀 주소” 한 후 소주에 고춧가루를 빨갛게 타서 마셨다. 감기를 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을 믿고 미련한 짓을 한 것이다. 그 날 생전 처음 땅이 도는 것을 보았다. 저 앞에 맨홀 구멍이 있는 것이 분명히 보였는데도 그곳을 피하기는커녕 어느새 그 구멍에서 빠져 나오려고 허둥대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만신창이가 되어 현관문 앞에서 큰대자로 뻗어버렸고 병원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서 의식을 찾을 수가 있었다. 그 날의 고통으로 위장이 말이 아니었고 한동안 술은 입에도 대지 못했다. 이를 딱하게 여긴 아내의 정성스러운 간호로 예상보다 일찍 건강이 회복되었다. 그동안 아내에게 다시는 술을 먹지 않겠다고 몇 번을 약속하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는지 모른다. 아내는 이러한 내 모습이 측은해 보였는지 가벼운 미소로

“그래요. 이젠 당신 건강도 생각해야지요.” 하면서

“술 끊겠다는 약속 믿어 볼게요.” 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북악 스카이 나이트클럽에서 후배와 술을 먹었는데 이것이 기어이 사고를 내고 말았다.

사진사는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즉석사진을 찍어서 인화된 사진을 주었고 나는 그 사진을 받아 옷 속에 집어넣고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술이 취하지 않았으면 혹시 아내가 옷을 받아 걸면서 뒤져 볼지 모른다는 우려로 없애 버렸을 텐데 당시 상황이 거의 만취상태여서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아침에 옷을 정리하던 아내가 주머니 속에 있던 그 사진을 발견하고 열이 폭발하게 된 것이다.

굉음의 내용은

“하다하다 이제 이런 젊은 계집까지 끼고 다니냐.” 는 항의였다. 단순히 그곳에서 만난 호스티스일 뿐이라고 극구 변명을 했지만 그런 곳에 직업 사진사가 있는지 상상조차 못하던 아내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사건이 말 많은 처제들에게 퍼지고 긴 생머리 모습이 찍힌 사진까지 열람되어 곤혹스러운 지경으로 몰리게 되었다. 한동안

“형부, 좋으시겠어요.” 라는 조롱도 감수해야 했다. 아무튼 무슨 변명이라도 해서 사태를 수습하기위해 아내의 마음을 잡는데 매달렸다.

“여보, 다시는 술집 같은 곳에 가면 내가 사람이 아니다.”

“앞으로는 담배도 끊고 퇴근하면 즉시즉시 집에 들어 올테니 한번만 봐줘라.” 매일 이런 애원을 반복해야만 했다.

아내는 남자가 밖에 나가면 그때부터는 내 남자가 아니라 무슨 짓을 하던지 관여하지 않는다는 이상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지만 긴 생머리의 젊은 여자의 실물 사진을 보고 나서는 잠시 질투에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이 사건의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어떻든 아내로부터

“그럼 또 한 번 믿어 볼게요.” 라는 답변을 듣기까지 약 반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그 일을 계기로 가부장적인 권위에 상당한 흠집이 잡힌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이를 계기로 담배도 끊었고 술도 거의 끊다시피 하게 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처음에는 나 자신도 그런 큰 변화를 기대하고 아내에게 사정했던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소나기가 올 듯 후텁지근한 날씨였다. 놀이터에서 놀던 5살짜리 손자가 오줌을 참으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집으로 들어 왔다. 이를 발견한 아내가 아이를 얼른 들어서 바지를 벗기고 소변을 보게 했다. 그런데 아이가 참지 못하고 팬티에 조금 묻혔다. 아내는 유치원에 다니는데 소변을 가리지 못하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을 했다. 아이는 자기가 빨리 누려고 했는데 바지가 내려가지 않아서 참고 집에까지 왔어 하면서 울먹거리면서 변명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었다. 그러자 아내는 아이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았는지 이내 얼굴에 웃음을 띠며

“그래 할머니가 너무 꽉 끼는 바지를 입혀서 그랬나 보다”고 하면서

“네가 이젠 오줌을 팬티에 싸지 않는 걸 믿어 줄께.” 하면서 달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아이는 몇 번 더 팬티를 적시는 실수를 했다. 그러나 아내는 그때마다 아이가 혹시 상처를 받을까봐

“할머니는 네가 밖에다 오줌을 눌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하면서 다독거렸다.

손자를 다루는 이런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아내는 나하고 결혼하면서부터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쳐가면서 우직하게 끝까지 믿어주어야 하는 미생지신(尾生之信)의 운명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