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류계花柳界란 어찌 보면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곳인지도 모른다. 진솔한 삶이 질펀하게 펼쳐지는 세상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그곳 제 일의 덕목은 예나 지금이나 정情을 두지 말라는 것이다.

허망한 세월의 별리別離에 상처를 염려한 것이다. 기녀妓女들은 일찍이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교방이나 권번을 나와 세상에 첫발을 디뎠다.

그것은 인생의 필연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에 웃고 그것에 울었다. 부처마저 경계하라 이를 만큼 그것은 이미 사람에게 피할 수 없는 유혹이 고, 고통이었던 것이다.

정을 주고 나서 뒤늦게 땅을 치는 것은 비단 화류계의 일만은 아니었다. 세상의 삶은 그보다 더했는지도 모른다. 삭막한 삶이 정에 약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녀석과 정을 맺은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짓이었다.

내가 녀석을 처음 만난 것은 몇 해 전 서울 도심에 있는 어느 산에서였다. 큰 수술을 마치고 건강을 위해 산에 다니던 때였다. 거의 매일을 산에 올랐다. 그리고 그 바위에 도착하면 나는 어김없이 놈을 만날 수가 있었다. 놈은 산에 사는 떠돌이 개였다.

어떤 때는 녀석이 먼저 그 바위에 올라 나를 기다리기도 하였다. 또 녀석이 보이지 않을 때엔 ‘황구야’ 하고 소리를 치면 놈은 어디선가 쏜살 같이 달려와 그 큰 덩치로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우리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시커먼 배낭에 등산용 스틱을 거머쥐고 산에 나타난 나를 놈은 몹시 경계했었다. 특히 놈과의 첫 대면에서는 더욱 그랬다.

어느 날 숲에서 갑자기 마주친 우리는 서로가 소스라쳤고, 나는 본능적으로 스틱을 쳐들었다. 놈은 피하지도 않고 이빨을 드러내며 적의를 보였다. 놈의 눈빛에 와락 소름이 돋았다. 긴박했던 바로 그 순간, 날카롭고 단호한 외침이 적막을 깨었다.

“황구, 이리 오지 못해.”

어떤 여자로부터 가까스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작년부터 이 산에 다녔다는 그녀는 개에게 퍽 익숙해 보였다.

괴괴한 산중에서 불쑥 마주친 커다란 개, 무심코 치켜든 내 지팡이에 개는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녀석에게 지워지지 않는 잔혹한 몽둥이의 기억일 수도, 사람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의 발로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여자로부터 개에 대한 내력을 들을 수가 있었다. 개는 처음 어떤 사람과 함께 가끔씩 산에 오르곤 하였는데, 어느 날부터 사람은 보이지 않고 야윈 개만 홀로 산을 방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병든 개를 주인이 버렸는지, 아니면 주인이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유기한 개가 스스로 산에 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개는 비루먹은 모습으로 산을 방황하며 사람들에게 쫓기곤 하였다. 이런 개를 산 아래 사찰의 어느 보살이 먹이를 주며 거둔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 후 개는 건강을 회복했고, 많이 순화된 모습으로 산에서 새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나는 뼈다귀를 챙겨 산에 올랐다. 산 아래 식당에 들러서, 아니 동네의 갈빗집에서 살이 붙은 뼈를 미리 모아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그 것을 황구에게 주었다.

어느 날 우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첫 스킨십을 나누었다. 녀석이 유기된 후, 비로소 다시 맺은 사람과의 첫 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놈은 벌써 사람을 용서한 것일까. 나는 왠지 너무도 빨리 여는 녀석의 마음에 알 수 없는 불길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기우杞憂이기를 바 랐다.

산과 숲이 주는 편안함과 여유로움에 우리는 어느덧 동화되고 있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우리는 몸을 벼랑 아래 바위 틈에 의지하며 한 점 걱정이 없었다.

그즈음 황구는 쓸개라도 빼어줄 듯 내게 매달렸다. 그간 녀석이 너무도 외로웠던 탓이다. 나는 쌓이는 정이 두렵고 불안했다. 애별리고愛別離苦, 문득 화류계의 덕목이 떠올랐던 것이다. 이제라도 정을 거두고, 거리
를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손을 모아 개의 목을 힘껏 죄어도 녀석은 지그시 눈을 감고 내게 몸을 맡겼다. 목숨을 맡긴 순종이고, 명운을 담보한 신뢰와 사랑이었다. 정이란 이처럼 목숨보다 더한 것이었다. 찰나의 내 생각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얼마 후, 우리는 기어이 나눈 정으로 하여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황구가 사라진 것이다. 불길했던 예감이 맞았던 것일까. 내 헤픈 정이 몹시 후회스럽고 가슴 저미는 아픔이 되었다.

황구가 사라지기 얼마 전 약수터 옆 정자에서 녀석과 더불어 잠시 소나기를 피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곳 마루에서 화투 패를 돌리던 사내들의 말이 마음에 밟혔다.

“어이 저 개, 떠돌이 개 아니야. 살이 많이 붙었어. 복날에는 역시….”
나를 따라온 황구를 알아보고 그들이 주고받은 말이다. 그 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와도 황구는 보이지 않았다.

화류계의 말처럼 떠날 것과 변할 것을 염려해 정이란 진정 주고받아서 는 아니 되는 것일까. 혹여 황구가 그 정 때문에 사람을 다시 믿고 사람의 손을 탔다면, 나는 진정 녀석에게 녀석의 삶에 그 무엇이 되었던가.

나는 오늘도 황구를 부르며 녀석이 없는 산에서 맺은 연緣을 생각해본 다. 어차피 알 수 없는 것이 인연이라면, 정 또한 그런 것이 아닌가.

불러도 대답 없는 녀석에게 정을 준 것이 가슴에 밟히고, 받은 정이 눈물겹다. 서로가 외로웠던 탓이다. 남은 것은 그리움이다. 이제 내가 간직할 것은 한 점 사무치는 그리움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