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의 서두다. 오랜 동안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수필의 정의와 개념이 돼왔고, 수필 쓰기의 전범(典範)이었다.

당시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쓰는 글’로 여기고, 여가가 생기면 써보는 비전문 장르인 것처럼 인식하던 때, 이 ‘수필’은 수필문학의 방향과 경지를 새롭게 설정해준 기념비적인 작품이었다. 수필쯤이야 누구나 쓸 수 있는 아마츄어 문학으로 알았던 사람들에게 최상의 경지를 지닌 문학임을 천명한 수필론이기도 했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청자(靑瓷)는 우리 민족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최고 경지의 도자기를 말한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우리나라 가을 하늘의 청명은 신비와 동경의 대상이었고, 이 빛깔과 마음을 영원의 빛깔로 탐구하여 피어낸 깨달음의 꽃이 청자가 아닐까. 연적은 벼루를 갈 때 쓰는 물을 담아두는 용기를 말한다. 연적의 물은 곧 생각이므로 단순하게 물을 담아두는 그릇이 아니며, 연적은 생각을 담아둔 그릇이 된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이 서두만으로 수필의 경지와 정의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주어와 술어로 된 이 단 문장이 수필의 지향점과 경지를 보여주고 무한의 함축성으로 여운을 불러일으킨다.

어중이떠중이가 닥치는 대로 함부로 쓴 글이 수필이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을 한 마디로 척결해버린 이 은유법은 수필의 진면목을 알리는 빛나는 문구(文句)가 되었다. ‘피천득=수필=청자연적’의 이미지는 수필에 대한 무지와 편견을 벗겨버린 놀라운 발견의 보석이었기에 공감을 얻었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은 진흙 속에서 발견해 낸 연꽃이었다. 이 한 편의 글이 수필에 대한 잘못된 인식과 천대와 소외의 그늘에서 벗어나 오늘날 당당한 삶의 중심문학으로 자리 잡게 하는 힘이 되었다. 내가 수필을 쓰게 되었을 때, ‘수필은 청자연적이다’는 말은 어둠 속에서 찾아가는 등대불이었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화초에 비유한다면 난이며, 새에 비유하면 학이며, 여인에 비유하면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라는 말은 그냥 수사법에 그친 것이 아니다. 수필은 자신의 삶을 통한 인생의 거짓 없는 토로요 반영이다. 작자는 난과 같은 삶, 학과 같은 삶을 갖고자 하며 추구한다. 인생에 대한 사상과 인품이 보인다. 수필은 쓰고 나면 그만인 글이 아니라, 그 글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경지의 문학인 것이다. 자신의 삶과 인생이 난초와 학과는 동떨어진 것이라면 이 글이 향기를 지닐 수가 없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이 명문인 것은 고결한 인품과 경지가 문장과 일치하는 데 오는 감동인 것이다. 옛 선비들이 지향했던 난과 학 같은 삶을 평생동안 보여준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글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 수필을 쓰는 어려움이 아닐 수 없다.

피천득 선생의 비유법 구사의 ‘수필’에 대하여 비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비판론자의 말을 들어보면 ‘수필이 청자연적이다’고 고정관념화 되어 수필의 다양성과 개성을 해치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수필이 청자연적, 난, 학이냐?’고 질문을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피천득 선생은 ‘수필’에서 자신의 수필관을 펼쳐 보였다는 것이다. 교과서에 수록된 이 작품을 가르칠 적에 무조건 암기 위주의 교육 자체가 문제였다. 삶에서 자신만의 모양과 빛깔과 향기를 보여야 하는 개성의 문학이 수필임을 가르쳐야 했다. ‘수필’을 전범으로 삼아 자신에게 맞는 그릇, 화초, 새, 여인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지, 반드시 청자연적, 난, 학,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을 닮으라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수필을 최상, 고결, 청초의 경지로 끌어올린 기념비적인 이 작품이 수필을 고정 관념화시켜 수필의 발전에 악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폄훼(貶毁)시키는 듯한 비난은 묵과할 수 없는 일이며, 사리에도 맞지 않다.

‘수필’엔 좀 납득하기 어려운 구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이 아니요, 서른 여섯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며,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는 생각은 오늘날엔 이론의 여지가 있다. 이는 연령과 성격을 제한하려는 의도가 아니고, 수필을 쓰기 위한 성숙한 경지와 자유스러움과 삶을 반영한 소박한 글임을 말한 것이다.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液)이 고치를 만들 듯이’란 표현에도 ‘붓 가는 대로’와 같은 비난이 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닥치는 대로 쓴다는 개념으로 해석하선 안 된다. 오랜 습작 과정을 거친 끝에, 고도의 질서와 자유로움을 얻은 막힘이 없는 글이 작자가 말하고자 하는 어의(語義)가 아니었을까.

피천득 선생의 ‘수필’은 읽을수록 빛나고 향기로운 수필의 전범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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