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자체를 수필처럼/최병호

  나는 촌뜨기다.
선 자리에서 360도를 다 돌아도 감싸주는 건 산, 산뿐인 분지, 그 아늑한 곳이 내 요람, '꿈엔들 잊힐 리야'다
화엄사에 올라 지리거산(智異巨山)을 등지고 앞을 바라보면 저만치 감돌아 나가는 섬진청강(蟾津淸江)이 눈부시다.
거산과 청강의 호응으로 부드럽게 가꾸어진 옥토! 나는 그 자양을 먹고 자란 신토불이다.

지리산 봉오리에 어느새 눈이 덮이고 또 문득 풀리기도 하는 초겨울쯤의 어느 날, 그 가장 낮은 지점에 난데없는 흰빛이 돋아난다.
오른편 노고단(老姑壇)과 왼편 종석대(鍾石坮) 자락이 각기 좌우로 비스듬히 내리닫다가 마주치는 지점,
사람들은 그 곳을 그냥 노고단이라 하기도 하고 무넹기(무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로 그 무넹기에 누가 성냥불이라도 그어댄 듯 갑자기 흰빛이 밝혀진다.

저게 뭔가? 어린 나는 그것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조금씩 움직이는데? 흰곰인가?
아니 흰 호랑인가? 와락 무섬 기가 들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들녘으로 내려온다 해도 그 사이에 충분히 안방으로 도망칠 수 있다는 희한한 계산을 해냈다.
제가 아무리 빨라도 무넹기에서 여기가 어딘데...
한참 후에 나는 어쩌면 그것을 지리산의 겨울 문지기일 거라는 편안한 상상을 했다.
그리고 혼자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불 켜진 것 봤냐? 흰곰 봤냐? 흰 호랑이 봤냐?" 또래들과 어울렸을 때 의젓하게 쏟아놓은 나의 질문이다.
아니 거드름이다. 바싹 호기심이 돋은 녀석들이 다투어 "언제, 어디서" 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잠시 뜸을 들인 후, 나는 "저기, 저기" 하고 지리산 쪽을 가리키며 눈을 껌벅껌벅했다.
폭소와 냉소가 뒤섞였다. 나는 간단히 실없는 아이가 되었다.
그러나 해명의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한 발짝 물러선 느긋한 심정으로 오히려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훨씬 훗날, 그곳을 답사하고 할아버지 말씀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그것은 바위를 타고 넘은 무넹기 물이 겨우내 얼어 있는 모습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것에 관해서 오늘까지도 무슨 비밀이나 된 것처럼 사뭇 함묵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문학하는 마음은 바로 이런 데서 싹튼 것이 아니었나 싶다.

섬진강 하면 물이 맑기도 유명하다.
마을 앞을 흐르는 서시내(西施川)을 따라 잠시 내려가면 이내 맑고 넒은 물줄기가 앞을 가로막는다.
그 흐름 속으로 냇물이 서슴없이 묻혀 버린다.
서시내와 섬진강이 하나가 되는 곳이다. 내 둔덕과 강 둔덕도 한 들로 펼쳐진다.
그곳을 사람들은 '양젱이'라 부른다. 여름날, 거기 서서 문득 고개를 들면 건너편 백사장엔 생명의 탄주 같은 이글대는 삼삼이가 넘쳐나곤 했다.

서시내는 어디 갔는가? 왜 금방 자취도 없이 사라지는가?
무슨 죄를 지어서 말 한마디 못하고 먹히는가? 강물도 조무래기들을 불러모아 멋대로 내닫는 키 큰 골목대장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우연히 양젱이를 나갔다. 희한한 현상을 보았다.
섬진강 상류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강물이 온통 홍수 빛이다.
서시내의 맑은 물이 그 홍수 빛 가장자리를 투명하게 채색하고 있다.
그러나 그 세가 너무나 요요했다. 서시내의 힘이 그 정도밖에 안되었던가?
좀 씁쓸한 심정이 되어 잠시 그 희한한 합류를 굽어보았다. 강물을 옆 찔러 맑혀 보려는 냇물의 항심이 문득 눈물겹게 느껴졌다.

반대의 경우도 보았다. 쓸어 갈 듯 퍼붓던 장대비가 변덕처럼 멎은 어느 하오,
나는 특별히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냥 양젱이로 내달렸다. 이건 또 뭔가?
강물은 그대로 맑은데 냇물을 무엄하게도 흙탕이 아닌가!
분노의 몸부림처럼 강물을 윽박지르는 세찬 흙탕...
그러나 강물은 이를 그 자장자리에 너그럽게 안으며 달래고 얼린다.
나는 그 화답의 흐름을 천천히 따라가 보았다.
떼쓰던 어린이가 엄마 품에 조용히 잠들 듯 흙탕도 차분히 성정을 재우고 마침내 맑음과 한 빛이 되었다.
나는 탄성을 외는 뜻밖의 시인이 되었다.

서시내, 섬진강, 양젱이 등이 내게 심어 준 그 다양한 서정들은 또 다른 나의 겨울 무넹기로, 문심의 씨앗이 아니었던가 싶다.

동시, 동화의 시절을 지나 시, 수필, 소설 등에 빠지고 다시 문학 이론 따위를 기웃거리던 어느 날, 나는 학교를 미치고 교원이 되었다.
서서히 철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 아침 일어나면 위대한 작가가 돼 있을 것 같은 위대한 환상은 햇볕 만난 안개로 사라졌다.
학생들을 돕는 일에만 마음을 모았다. 그것은 신명나는 생명력의 환희이기도 했다.

어쩌다 펜을 들면 수필 비슷한 게 써졌다.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내 느낌, 내 생각, 내 체험을 내가 쓰는데 왜 그리 어려운가? 허구체계를 세워 거창한 로망을 짜는 것도 아니고 금싸라기를 일어내는 것도 아닌데...
글이란 아무나 쓰는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직무상 문예반을 지도하고 교지, 학보, 눈문집 등을 펴내기도 하면서 그런 생각을 더욱 짙게 했다.

삶 자체를 수필처럼 살 수는 없을까. 밑천을 다 털고도 격을 잃지 않는,
그러면서도 웃음이 절로 나고 재치가 넘치는, 그러면서도 누구나 공감하는 진실과 아름다움이 그윽한, 그런 삶을 영위할 수는 없을까.
글 이전에 일상 자체를 글쓰듯이 산다면 그보다 값진 일이 또 어디 있을까. 그런 상념을 나는 늘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문단인 명부에 끼는 입장이 되었다.
보상하는 마음으로 촌뜨기답게 나는 무넹기와 양젱이로 접목되는 우리 할아버지의 말씀을 수필의 한 기법으로 제시하고 자 한다.

짚신을 삼아서 생계를 꾸리는 부자가 있었다.
아들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아버지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그 연유를 물어도 묵묵부답이었다. 이윽고 아들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게 되면서 마지막으로 그 비법을 간청했다.
손을 설래설래 흔들던 아버지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터럭 터럭(털)" 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수필에 있어서 털은 일상생활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다듬어 버려야 할 군더더기가 아닌가.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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