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기생 만덕에게 정조 임금이 물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특별히 원하는 건 없고 임금님 계신 곳 바라보고 금강산 일만이천봉을 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장사해서 모은 큰돈으로 기아에 허덕이던 제주 백성 1천여 명을 살려낸 만덕(萬德, 1739~1812)이었다. 1795년의 일이다. 나라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한 그녀에게 임금이 제주 목사를 통해 그 소원을 물은 것이다. 당시의 국법에는 제주 여자가 뭍으로 나오는 것이 금지되었다. 궁궐과 금강산, 조선 최고의 두 구경거리에 만덕은 임금님 카드로 승부를 걸었다.
일부 남자들, 여자들 관광에 시비를 걸다
정도의 차이일 뿐 여자들의 노는 것을 남자들이 싫어하기는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여자의 외출이 남자를 불편하게 한다는 일차적인 이유 외에 시대적 관념이란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부녀들이 길거리에 나와 구경하며 웃고 즐기는 것을 계속 문제 삼았다. 정확하게 말하면 좀 특이한 취향을 가진 대신(大臣) 몇 명이 조정회의에서 ‘여자들 밖으로 못 나오게 해 달라’고 임금에게 다그쳤다. 그들은, 구경거리가 있을 때마다 여자들이 거리에 몰려나와 천막을 쳐놓고 음식까지 만들어 먹으며 법석을 떨고 있다고 하였다. “부녀 노는 것을 법으로 막아주소서!“(세종 13년) 또 “사신행차에 여자들이 길가에 모여들어 구경하는 것을 금지하소서.”(문종1년) 왕이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부녀 관광’ 시비에 임금들은 ‘부녀도 내 백성인데 즐겁게 노는 것이 뭐가 나쁘냐?’며 금지시키지 않았다.
임금이 친경(親耕)하러 동대문의 선농단으로 거둥하자 그 행차를 보려고 나온 부녀들이 거리를 메웠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조정 회의에서 ‘부녀 관광’ 문제가 또 거론되었다. 성종 임금은 “부녀들이 거리에서 자는 것도 아닌데 노는 게 무엇이 문제냐?”고 했다. 한 대신은 ‘임금의 거둥 시간이 이른 아침이라 거리에서 자지 않고는 구경할 수 없다’고 하면서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 부녀가 유독 노는 것을 밝힌다고 하였다. 이에 성종은 부녀 관광은 국속(國俗)을 따른 것이니 더 이상 문제 삼지 말라고 했다. 리더에게는 남다른 스케일이 있는 것 같다.
그나저나 임금은 행차 때 자신을 열광하는 부녀들을 은근히 즐긴 것은 아니었는지? 관광 금지를 주장한 그 남자들은 임금과 호종 대신들에 열광하는 아내가 미웠던 것은 아닌지? 최고 스타에 열광하는 오빠부대를 방불케 하는 그때 그 여성들도 금지와 허용의 줄다리기를 하며 놀 만큼 놀았던 것 같다.
1569년 8월 어느 날, 유희춘은 아내 송덕봉(1521~1578)이 임금 얼굴 ‘구경하기’를 소원하자 삼경(三更, 밤11~1시)에 종묘 앞에 사는 조카의 종 억정의 집으로 보내 대기하게 했다. 정승 남편이 매일 보는 그 용안을 아내는 직접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종묘에 제사 지내러 나온 임금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 밤에야 돌아온 아내 송씨는 임금 모습을 흉내내며 ‘그런 기이한 구경’ 처음이라고 매우 좋아했다. 남편의 『미암일기』에 나온다.
판관 부인 남씨, 구경에 승부를 걸다
구경에 승부를 건 여자가 또 있다. 1769년(영조 45) 8월 24일, 남씨 부인은 함흥 판관에 임명된 남편에 앞서 서울을 출발한다. 이유인즉 함흥 가는 길의 명승고적을 다 보고 싶은 욕심에서이다. 함흥에 살게 된 남씨는 이곳저곳 구경하고 싶은 욕구로 몸살을 앓는다. ‘가고 싶다’, ‘보고 싶다’를 반복하며 판관 남편과 거의 매일 입씨름을 한다. 더구나 관청의 기생들이 꼭 봐야 할 장관이라고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동해의 일출(日出)로 몇 번을 남편과 실랑이를 벌인다.
여기서 오십 리라 하니 마음에 중란(中亂)하되 기생들이 못내 칭찬하여 거룩함을 일컬으니, 내 마음이 들썩여 원님께 청한대, 사군(使君)이 하시되 ‘여자의 출입이 어찌 경(輕)히 하리오’ 하여 딱 잘라 거절하니 하릴없어 그쳤다가, 마음이 다시 들썩여 하 간절히 청하니 ……
하지만 남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남씨는 남편과 맞짱을 뜨기로 한다. 그녀는 짧은 인생 한 번 가면 돌아오는 일 없고, 마음에 쌓인 우울증은 만금으로 치료하기보다 한 번 노는 게 더 낫다고 했다.
인생이 기하(幾何)오? 사람이 한번 돌아가매 다시 오는 일이 없고, 심우(心憂)와 지통(至痛)을 쌓아 매양 울울하니 한 번 놀아 심울(心鬱)을 푸는 것이 만금(萬金)보다 나으리니……
결국 남편의 동행으로 해돋이를 구경하기로 했다. 일행을 이끌고 근처에 숙소를 정했는데, 남씨는 혹여 못 볼까 노심초사하며 뜬 눈으로 새벽을 기다린다. 먼 데서 닭이 울자 곧장 일어나 기생과 비복을 흔들어 깨우자, 급사가 와서 아직 너무 일러 떠나지 말라는 원님의 말을 전한다. 그 경고를 들을 리 없는 남씨.
곧이 아니 듣고 발발이 재촉하여, 떡국을 쑤었으되 아니 먹고, 바삐 귀경대(龜景臺)에 오르니 달빛이 사면에 조요하고, 바다이 어제 밤도곤 희기 더하고, 광풍이 대작(大作)하여 사람의 뼈를 사못고, 물결치는 소래 산악(山嶽)이 움직이며, 별빛이 말곳말곳하여 동편에 차례로 있어 새기는 멀었고, 자는 아해를 급히 깨와 왔기 치워 날치며 기생과 비복이 다 이를 두드려 떤다.
구경의 참맛을 구현하다
추위에 떠는 사람들을 본 남편은 쓸데없이 일찍 올라와 다 큰 병 나게 생겼다고 못마땅해 한다. 이에 남씨는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 아무 소리 못 하고 추워하는 기색을 숨기며 죽은 듯이 앉아 있다. 동쪽 바다를 응시한 채.
이윽고 날이 밝으며 붉은 기운이 동편 길게 뻗쳤으니, 진홍 대단 여러 필을 물 우희 펼친 듯, 만경창파 일시에 붉어 하늘에 자옥하고, 노하는 물결 소래 더욱 장(壯)하며, 홍전 같은 물빛이 황홀하여 수색이 조요하니, 차마 끔찍하더라.
붉은 기운이 온 사방에 다 퍼졌지만 해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사람들은 다시 떠들기 시작했다. 붉은 기운 속에 해가 들어있다, 아니다 해가 따로 나올 것이다는 등. 산을 내려가는 자 산에 남는 자, 분주한 가운데 드디어 해가 솟았다. 이에 남씨는 길이 남을 명문장으로 동해의 일출을 섬세하게 그려내었다. 우리 교과서에서도 소개되었던 〈동명일기(東溟日記)〉가 그것이다. 의유당(意幽堂) 남씨의 풍경 묘사는 섬세하고 지적이며, 참신하고 열정적인 어휘를 구사한 자유분방함이 돋보이는 것으로 평가된다. 해가 솟아 오르자 “처음 붉어 겉을 비추던 것은 모여 소 혀처럼 드리워 물속에 풍덩 빠지는 듯 싶더라.”
출처 ; 실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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