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대규와의 문학론 서간집 -조병화 시인의 편지-에서


서로 생각하는 사람이 서로 떨어져서 살고 있다는 건 즐거운 일입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주동일이라는 학생. 지금은 물리학으로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 당당한 미국 대학의 교수이지만, 내가 서울 고교에 재학하고 있을 때, 나에게 수학을 배웠습니다. 그 반의 반장이었으며, 4학년 전체의 톱이었습니다.

한번은 수학 시간에 글을 쓰게 했습니다. 동일의 글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나는 고향이 없다.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에서 자라서,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까 시시하다. 방학에 자기 고향을 찾아 내려가는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 짝이 없다. 그래서 정거장까지 따라 갔다 돌아온다.' 는 겁니다. 그런데 6,25가 났습니다. 서울고교는 부산 송도 언덕에 천막을 치고 공부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때의 동일으 글엔 '이제 이곳에 피난 와서 나에게도 고향이 생겼다. 피난을 와서 불편한 점도 많지만 고향이 생겨서 좋다. 서울은 나의 고향, 그 곳에 있는 벗이 그립고, 그리운 벗에게 편지를 쓰게 되어 좋다. 고향, 그리움, 벗, 편지, 한꺼번에 나의 소망이 풀렸다.' 이러한 것이었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향수라는 게 본능적으로 있는 겁니다. 항상 미지의 세계를 그리워하며 동경하고, 그 곳에 꿈을 걸고 하는 하나의 시의 세계, 대규는 지금 허허한 나에게 그걸 보내고 있는 겁니다. 미지에게 띄우는 편지는 곧 자기 스스로에게 띄우는 편지이니까요.

진실한 시인은 누구나 비슷한 생각들을 하는 모양입니다. 나는 동경 고등사범 시절 수학 시간에 이런 걸 생각했습니다.
인간의 수명, 그 생명은 곧 시간의 향수이며, 인생을 극히 제한된 그 시간 내의 변화이며, 그 인간의 한 생애라는 건 그 제한된 시간 내에 있어서의 모든 변화를 시간으로 적분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그림 그 결과는 관이며 죽음이라는 거.

그러나 그 인간이 노력한 만큼의 알파를 남기는 법, 이런 인생관을 그리며, 시간을 아끼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시간은 곧 생명, 그 짧은 시간(나에게 배당된 시간=나의 생애)을 완전히 나로 하여 연소시키고자 하는 생활을 해 왔습니다. 관만을 남기는 게 아니라 알파라는 나를 남기기 위해서.

그런데 S. 스펜더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인간은 태양에서 나와서 태양으로 돌아가는 짤막한 여정을 사는 거에 불과하다.
그런데 위대한 인간만이 그 짧은 여정에 자기 서명을 하나 던지는 법이다.' 이렇게 위대한 인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자기 서명을 남기는 사람, 남기지 못하는 사람, 알파를 남기는 사람, 남기지 못하는 사람, 이게 같은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또 R. M. 릴케는 그의 시집 <오르페우스에 바치는 소네트>의 서문에서, '우리 인간의 생명은 죽음이 잠시 빌려 준 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은 그 인간을 다시 불러들일 때, 이자를 요구한다. 그러나 이자를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 이자 없이 돌아가는 사람, 본전까지 까먹고 돌아가는 사람' 이 있다는 것이다. 많은 창업을 쌓은 삶은 그만큼 많은 이자를 가지고 죽음으로 돌아간다는
말이겠지요.

릴케의 이자의 생각이나, 스펜더의 서명의 생각이나, 나의 알파의 생각이나 죽음, 인간 생명의 극한에 관해서 같은 생각이 아니겠어요. 이렇게 우연한 일치를 많이 발견하곤 합니다. 그 생애에 있어서, 그 작품에 있어서.

좀 추위를 잊어보았습니다.
그럼 또.

혜화동 趙

*회신(63년 1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