風蘭
나는 난을 기른지 20여 년 20여 종으로 30여 盆까지 두었다. 동네 사람들은 니의 집을 화초집이라고도 하고, 난초 병원이라기도 하였다.화초 가운데 난이 가장 기르기 어렵다. 난을 달라는 이는 많으나 잘 기르는 이는 드물다. 난을 나누어 가면 죽이지 않으면 병을 내는 것이다. 난은 모래와 물로 산다. 거름을 잘못하면 죽든지 병이 나든지 한다. 그리고 볕도 아침 저녁 외에는 아니 쬐어야 한다. 적어도 10년 이상 길러보아야 그 미립이 난다 하는 것, 첫째 물 줄 줄을 알고, 둘째 거름 줄 줄을 알고, 셋째 위치를 막아 줄 줄을 알아야 한다. 조금만 촉냉觸冷해도 감기가 들고 뿌리가 얼면 바로 죽는다.
이전 서울 桂洞에 홍술햇골에 살 때의 일이었다. 휘문중학교의 교편을 잡고 독서 作詩도 하고 古書도 사들이고, 그 틈으로써 난을 길렀던 것이다. 한가롭고 자유스런 맛은 몹시 바쁜 가운데에서 깨닫는 것이다. 원고를 쓰다가 밤을 새우기도 왕왕 하였다. 그리하면 그리 할수록 난의 위안이 더 필요하였다. 그 푸른 잎을 보고 芳烈한 향을 맡을 순간엔, 문득 환희의 別有 世界에 들어 無我無想의 境地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어 학회 사건에 피검되어 홍원 함흥서 2년 만에 돌아와 보니 난은 반 수 이상이 죽었다. 그해 려산礪山으로 돌아와서 십여 분을 간신히 살렸다. 갑자기 8.15 광복이 되자 나는 서울로 또 가 있었다. 한 겨울을 지내고 와보니 난은 모두 죽었고, 겨우 한 뿌리만 성한 것이 두어 개 있었다. 그걸 서울로 가지고 가 또 살려 잎이 돋아 나게 하였다. 건란建蘭과 춘란春蘭이다. 춘란은 중국 춘란이 진기한 것이다. 꽃이나 보려 하던 것이, 또 6.25 전쟁으로 피난하였다가 그 다음 해 여름에 가 보니, 장독대 옆 풀섶 속에 그 고해枯骸만 엉성하게 남아 있었다.
그 후 전주로 와 양사재養士齋에 있으매, 소공素空이 건란 한 분을 주었고 高敬善군이 제주서 풍란 한 등걸을 가지고 왔다. 풍란에 웅란雄蘭, 자란雌蘭 두 가지가 있는데, 자란은 이왕 안서岸曙집에서 보던 그것으로서 잎이 넓죽하고, 웅란은 잎이 좁고 빼어났다. 물을 자주 주고, 겨울에는 특히 옹호하여, 자란은 네 잎이 돋고 웅란은 다복다복하게 길었다. 벌써 네 해가 되었다.
십여 일 전 나는 바닷게를 먹고 중독되어 곽란이 났다. 5,6일 동안 미음만 마시고 인삼 몇 뿌리 달여 먹고 나았으되, 그래도 병석에 누워 더 조리하였다. 책도 보고 시도 생각해 보았다. 방열 청상淸爽한 향이 움직이고 있다. 나는 밤에도 자다가 깨었다. 그 향을 맡으며 이렇게 생각을 하여 등불을 켜고 노트에 적었다.
잎이 빳빳하고도 오히려 영롱玲瓏하다.썩은 향나무 껍질에 玉같은 뿌리를 서려두고 淸凉한 물기를 머금고 바람으로 사노니.
꽃은 하이하고도 여린 자연紫烟 빛이다. 높고 조촐한 그 品이며 그 香을, 숲속에 숨겨 있어도 아는 이는 아노니.
완당頑堂 선생이 한묵연翰墨緣이 있다듯이 니는 난연蘭緣이 있고 난복 蘭福이 있다. 당귀자, 계수 나무도 있으나, 이 웅란에는 伯仲할 수 없다. 이 웅란 珍貴하다.
'간죽향수문주인看竹向須問主人' 이라 하는 시구가 있다. 그도 그럴 듯 하다. 나는 어느 집에 가 그 난을 보면,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겠다. 古書도 없고, 蘭도 없이 되잖은 書畵나 붙여 논 방은, 비록 화려 광활하다 하더라도 그건 한 요릿집에 불과하다. 두실와옥斗室蝸屋이라도 고서 몇 권, 난 두어 분 , 그리고 그 사이 술이나 한 병을 두었다면 三公을 바꾸지 않을 것 아닌가! 빵은 육체나 기를 따름이지만 난 은 정신을 기르지 않는가!
李秉岐(1891-1968)
1891-고종~1968. 국문학자. 시조시인.본관은 延安. 號는 가람嘉藍.전북 익산 출신.변호사 채의 큰 아들. 1898년 부터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당대 중국의 사상가 양계초梁啓超의 <飮氷室文集>을 읽고 신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주요 저서로는 <가람시조집>을 비롯하여 <국문학개론>.<국문학전사>. <가람문선> 등이 있으며 그는 많은 수필을 썼고. 특히 평생동안 극명하게 쓴 일기는 놀랄 만 하다.
가람과 난초
가람 이병기는 그의 생활과 작품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가람이 그의 생애에 걸쳐 술과 난초와 책을 얼마나 사랑하였는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호방하고도 거리낌없는 기절을, 책에 대한 학자로서의 열정을 나타낸 것이라면, 난초에 대한 사랑은 고아한 풍경속에서 새로운 향기를 찾으려 했던 시조 시인으로써의 노력과 그 뜻을 같이 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난초가 가람의 작품세계를 해명하는 상징물로서 등장한 것은 결코 범상한 일이 아니다. 난초 이외에도 매화 ,수선화는 가람의 대표적인 소재이다. 이것들은 어렵고 각박한 고난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꿋꿋한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이니, 가람의 삶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곧 가람 자신의 마음과 표상을 난초의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