餘白

노천명

나는 헌책가게에서 책을 뒤적거리다 가끔 그 책의 내용이 좋아서기보다 책꾸밈새가 재미있어도 사들고 들어오는 수가 있다. 그것은 우리 나라에서는 장정(裝幀)에 특별히 유의를 해주는 화가가 드물기 때문에 책을 낼 때면 나중에 가서 이 장정 때문에도 머리를 써야하는 데서이지만 어쨌던 시집을 펴보다가 여백을 많이 남기고 짠 것을 보면 좋아서 냉큼 사드는 것이 내 버릇이다. 활자를 한편으로 몰고라도 종이의 공간을 많이 남겨 놓은 것은 재미있다.

사진틀에다 사진이나 그림을 넣는 데 있어서 안에 드는 사진이 꼭 들어맞는 것보다는 사진이 다만 몇 푼이라도 남은 둘레를 가지고 들어앉게 되는 것을 원한다.

여백...... 이 얼마나 좋은 말이냐! 아니 얼마나 즐거운 것인가? 빈틈 없이 빽빽한 것은 딱하다. 인생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데 있어서도 이 여백은 있어 좋은 것이다.

여백의 즐거움이 하필 책 생김에서만 머무를 것이랴. 이 여백이 없어서 우리는 모두 눈들에 핏발이 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출중하지 못한 사람이 남녀간에 안 살 뿐 아니라 오히려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는 것이라든지 또는 어느 구석엔지 좀 어리숙해 보이는 여성을 남자들은 하나같이 좋아하는 경향을 분석해 본다면 이것 역시 다름아닌 '여백'을 구하는 심리에서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나 아는 어떤 분은 술이 먹힐 것 같다고 해서 술구멍을 찾아다닌다고 저물도록 길로 싸다니시는 분이 있는데 이런 일도 여백을 찾는 절박한 행위에 다름 없을 것이다.

정치인의 여백---- 마찬가지로 예술인에게도---- 인생 전반에 걸쳐서 여백은 요망되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 같은 시절엔 절실한 것이다. (1956. 9. 7)

*노천명 에세이 '꽃길을 걸어서'에서 뽑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