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 선 현

행복한 자는 고독을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독을 모르는 자가 인생을 생각하려는 기질이 넘쳐 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보편성을 잃는 자는 언제나 이 고독을 외면하며 살기 어렵다.

사람이 정말 그리워서, 오늘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어 명동으로 간다. 딱히 명동 골목을 걷자고 해도 옆에 말 통하는 지기가 있다거나 말은 안 통할지언정토론거리를 물고 늘어지는 고집 센 친구를 대동한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낯모르는 수많은 사람 틈새를 비집으며 걷는 것이 혼자인 것보다는 좋다. 이 초면인 사람들을 만나려고여기까지 왔으므로 나는 오늘 혼자가 아니다.
지금 이 시간, 내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일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 무슨 일인가에 매달려 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을 것이다. 누구는 바이어와 상담하느라 광화문에 가 있을것이고, 누군가는 컴퓨터 앞에서 중독이 되어 가고 있을 것이며, 또 누군가는 지방도로를 달리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서류와 씨름을 하는 그 누군가도 꽤나 있을지 모르겠다.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좀 풀린다. 무엇이든 반대급부란 것이 있으니까, 저것이 안 좋으면 이것은 더 좋을 수 있는 문제이다. 나는 지금 사람이 그리울 정도로 외롭지만 또 그런 이유로 인해 자유로운 시간을넘쳐 나게 쓰기도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몰린 곳으로 다가가 그들의 표정을 기웃거릴 여유도 있다.
그리하여 얼음에 재운 과일즙이 뚝뚝 떨어지는 파인애플이나 멜론 한 조각을 들고서 머리핀이나 부채, 선글라스, 티셔츠를 파는 리어카 상인들 곁을 어슬렁거린다. 금방 사기라도 할듯 값을 물어보고 만져 보기도 한다. 그들은 주위에 사람이 몰릴수록 도움이 되는지 신이 나서 말을 걸어온다.
충분하지 않은가. 주위에서 모두들 일 하느라 바빠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면 이런 식으로 입을 틔울 수 있다.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는 날이면 이렇게 시내를 활보해도 좋다. 그러다가 이 행위 자체를 인식하는 비운의시간이 찾아오더라도 슬퍼할 것은 없다.
비가 오는 날처럼 우산을 사면 되리라. 그리고 세 처녀신을 부르리라. 아르테미스와 헤스티아와 아테나를 불러 함께 비를 맞을 수 있다. 그들은 기꺼이 나와 주리라. 바쁘다고 부름을 중간에서 끊는 매몰찬심성을 지닌 여인들은 아니다. 쉬지 않고 비가 쏟아져 옷이 젖고 입술이 젖고, 얼굴이 범벅이 되고 그리고 옷소매가 축축해지도록 우산을 받치고 기다려 줄 그들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고독이란 집의 뒷문으로 강인하고독립적인 정신이 한 발을 들이밀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오늘은 몇 번째의 우산을 구입해야 되는 것일까.